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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삭주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삭주부(朔州府)는 조선 태종 때 도호부로 승격하여 설립된 이후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되어 압록강 변의 변방 일대 관문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의주부 삭주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삭주부는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국방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강계, 위원, 이산, 벽동, 의주, 창성과 함께 강변 7읍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 초에 군현을 통폐합할 때 지군사(知郡事)를 두었으며, 태종 때는 도호부로 승격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한때 진(鎭)을 옮기면서 군으로 강등되기도 했지만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다른 이름으로 영새(寧塞), 진북관(鎭北館)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삭주부는 1395년(태조 5)에 인근 군현을 통폐합할 때 종4품의 지군사를 두어 다스리다가 1413년(태종 13)에 삭주도호부로 승격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호부사와 교수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교수를 폐지하였다. 종6품의 교수는 교관으로 지방에서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도호부사가 삭주도중익병마(朔州道中翼兵馬)를 겸하다가 이후에는 국경을 대치한 지리적·군사적 전략상 이유로 독진영장(獨鎭營將)을 겸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삭주부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3명, 군관행수 1명, 병방행수 2명, 장무관 2명, 중군 1명, 마병별장 1명, 천총 2명, 파총 3명, 기고관 4명, 초관 13명, 봉수별장 6명, 집사기패관 10명, 아전 23명, 통인(通引) 15명, 사령 12명, 군뢰(軍牢) 15명, 관노 104명, 관비 122명과 각 청의 청직 18명, 각 창고의 사령 4명, 각종 명색 장인(匠人) 59명이 있었다.

변천

삭주부는 고려시대에 영색현(寧塞縣)으로 불리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삭주방어사(朔州防禦使)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에 군현을 통폐합할 때 대·소 삭주(大·小朔州)와 구주(龜州)를 합하여 지삭주군(知朔州郡)으로 하고 종4품의 지군사를 두었다가 1413년에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로 고칠 때 삭주도호부로 승격하여 도호부사를 두었다. 1415년(태종 15)에 관제 개편을 할 때 이성도도병마사(泥城道都兵馬使)를 고쳐서 삭주도병마절제사(朔州道兵馬節制使)로 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진을 창성군으로 옮겨 창성을 도호부로 삼고 대신 삭주를 군으로 낮추었다가, 이듬해에 삭주 백성들 100명이 상언(上言)을 올려 삭주 지역의 석성(石城)이 완고하니 도호부로 승격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다시 도호부로 올렸다(『세종실록』 21년 윤2월 15일).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의주부 삭주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