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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영흥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영흥부(永興府)는 1393년(태조 2) 설치되어 성종~중종대에 일시적으로 함경도의 감영 소재지가 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의 관제 개혁에 따라 영흥군(永興郡)으로 개편되었다. 장관은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서 영흥부의 행정을 총괄하였다. 조선전기 진관(鎭管) 체제에서는 함흥진관(咸興鎭管)의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였으며, 조선후기의 진영장(鎭營將) 체제에서는 중영장(中營將)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함경도의 행정과 군사의 핵심 지역의 하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장령진(長嶺鎭)이라 하였으며, 당문(唐文)·박평군(博平郡)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초에는 화주(和州)라 했다. 955년(고려 광종 6)에 성보(城堡)를 쌓았으며, 995년(고려 성종 14)에 화주안변도호부(和州安邊都護府)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강등하여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고종 때 조휘·탁청(卓靑)이 귀부(歸附)하면서 원(元)나라에 흡수되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편입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쌍성총관부를 혁파함으로써 화주목(和州牧)이 되었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과 소윤(少尹)·판관(判官)을 두었으며, 이듬해에 토관(土官)을 설치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3년(태조 2)에 영흥진(永興鎭)이 왕의 외할아버지 최씨(崔氏)의 본관 고을이라 하여 화령부를 영흥부(永興府)로 고쳤다(『태조실록』 2년 9월 14일). 1426년(세종 8) 태조가 태어난 땅이라 하여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세종실록』 8년 2월 10일).

조직 및 역할

대도호부사는 문관 정3품 당상관이다. 함흥진관의 병마첨절제사와 중영장·토포사를 겸하였으며,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대도호부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3명, 아전(衙前)·통인(通引) 75명, 사령(使令) 16명, 군뢰(軍牢) 16명, 관노(官奴)·관비(官婢) 94명, 교노(校奴)·교비(校婢) 73명, 원노(院奴)·원비(院婢) 66명이 있었다. 또 영흥부에 소속된 대솔군관(帶率軍官) 560명, 토포군관(討捕軍官) 30명, 군기가솔(軍器假率) 200명, 착호가솔(捉虎假率) 200명, 봉무사(烽武士) 200명, 관일수(官日守) 30명, 역일수(驛日守) 27명, 진전수호군(眞殿守護軍) 80명, 본궁내노비(本宮內奴婢) 133명, 수철장(水鐵匠) 79명, 목자(牧子) 143명, 교생(校生) 90명, 원생(院生) 40명, 풍헌(風憲) 13명, 약정(約正) 13명, 봉무사 별장(別將) 1명, 감관(監官) 1명이 있었다. 또 각 창고에 각각 감관 1명, 색리(色吏) 1명, 고자(庫子) 1명, 사령(使令) 1명을 두었다. 또 영흥부에는 순영(巡營) 소속의 친기위(親騎衛)가 164명, 남병영(南兵營) 소속의 친병가솔(親兵假率)이 760명 있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영흥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관아가 소재한 홍인사(洪仁社)를 위시하여 복흥사(福興社), 순녕사(順寧社), 억기산사(憶岐山社), 장평사(長坪社), 고영인사(古寧仁社), 이인사(里仁社), 덕흥사(德興社), 장흥사(長興社), 정변사(靜邊社), 요덕사(耀德社), 횡천사(橫川社), 운곡사(雲谷社)의 13사(社)가 있었다.

변천

1402년(태종 2)에 영흥부 사람들이 조사의(趙思義)를 따라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하여 군(郡)으로 강등시켰다가(『태종실록』 2년 12월 16일), 1404년(태종 4)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태종실록』 4년 8월 6일). 1416년(태종 16)에 다시 화주(和州)라 하였으며, 목사(牧使)와 판관을 두고 토관을 없앴다(『태종실록』 16년 9월 9일). 1426년(세종 8)에 영흥대도호부로 고쳤고(『세종실록』 8년 2월 10일), 1455년(세조 1)에 진(鎭)을 설치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70년(성종 1)에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부(府)로 승격시켜 토관을 두었다(『성종실록』 1년 2월 17일). 1498년(연산군 4)에 다시 관찰사의 본영을 함흥부(咸興府)로 옮기고 영흥대도호부로 강등시켰다(『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

1895년(고종 32) 대구역주의인 8도제가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함흥부 소속의 영흥군으로 바뀌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영흥군은 다시 함경남도에 소속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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