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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4 기준 최신판



1895년 9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한 지방 군대.

개설

1895년 9월 갑오개혁 때 지방의 군대를 통폐합하여 지방의 진위대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평양과 전주에 설치하여 지방의 소요(騷擾)를 안정시키고 변경의 수비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지방에 지방대를 설치하였다가 1898년에는 14개 지방대대로 확대하였다. 1900년 6월 새로 진위대가 설치되어 같은 해 7월에는 지방대가 진위대로 통일되었고,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었다. 1905년 4월 일제에 의해 진위대 병력은 8개 대대로 크게 축소되었다가 1907년 8월 해산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갑오개혁에서는 1895년 3월부터 지방에 주둔한 각종 군대를 통폐합하는 작업에 나서 8월 2일 전국적으로 옛 군제를 폐지하였다. 1895년 9월 13일 칙령 170호 육군편제강령(陸軍編制綱領)에 의거하여 중앙의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가 새롭게 창설되었다. 지방의 진위대는 부(府) 또는 주요 지방에 주둔하여 지방의 소란을 안정시키고 변경의 수비를 전임하였다. 평양부와 전주부에 2개 대대가 설치되었다. 대대본부에 대대장으로 참령(參領) 1명, 향관(餉官)으로 1등 군사(軍司) 혹은 2·3등 군사 1명, 부관으로 부위(副尉) 1명, 무기를 담당하는 참위(參尉) 1명을 두었다. 1개 중대에는 중대장인 정위(正尉) 1명, 소대장인 부참위(副參尉) 3명, 정교(正校) 1명, 부참교(副參校) 15명, 병졸 200명이 있었다. 1개 중대 병력은 220명이었으며 2개 중대 단위로는 총 444명이었다.

조직 및 역할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5월 30일 각 지방의 구식 군졸들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600명이었다.

1899년 6월에는 지방대가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설치된 원수부(元首府)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의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지방대와 진위대의 명칭 통합이 요청되었다.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일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에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었으며, 총병력 18,000명과 378명의 곡호대(曲號隊)를 가졌다.

진위대의 병력은 영관(領官), 위관(尉官), 정교(正校), 부교(副校), 참교(參校), 병졸, 곡호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월급은 참령 77원 35전, 정위 46원 75전, 정교 9원, 병졸 3원이었다. 군인의 월급은 1896년 지방대 시절에 비해 정교·부교·참교의 월급이 약간 올랐을 뿐 큰 변동은 없었다. 진위대 예산은 군인들의 월급을 비롯하여 피복비·음식비·치료비·연습비·여비·매장비 등으로 쓰였다. 진위대의 예산은 주로 역토(驛土)에서 징수하는 세금이나 인접 고을의 결전(結錢) 등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재정 부족이 문제가 되었다.

진위대의 역할은 주로 지방에서 일어난 각종 소요 사태와 활빈당(活貧黨) 등의 변란들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 외에 범죄자 포착, 지역 순찰 등과 더불어 중국 국경을 수비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변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4월 16일 진위대의 병력을 크게 감축시켰다.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다.

진위대는 1905년 이후 의병 대장 원용팔을 체포한 것을 비롯하여 강릉·단양·예천의 의병을 체포하거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잃은 후 진위대는 오히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 운동을 진압한 것이다.

일본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1907년 8월 중앙의 시위대를 해산하고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순차적으로 진위대도 해산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의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해산 군인들은 일제에 적극 대항하여 의병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는 1907년 8월 5일 민긍호(閔肯鎬)와 김덕제(金德濟)가 이끈 원주 진위대의 봉기, 같은 해 8월 9일 수원 진위대 강화 분견소의 봉기 등이 있다. 해산 군인의 의병 항쟁은 당시 정미의병을 더욱 고조시켰으며 독립 투쟁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43: 국권회복운동』, 국사편찬위원회, 199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1: 의병항쟁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0.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혜안, 2000.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 조재곤, 「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 『역사와현실』19,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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