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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수원 지역에 설치한 진관.

개설

수원은 고려충선왕 때 목(牧)에서 부(府)로 강등되었던 것이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조선초기에 처음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어 계수관(界首官)으로 정해졌으나, 한양으로 도성을 옮긴 뒤에는 경기좌도로 소속이 바뀌었다. 세조대에 부평도(富平道)의 좌익(左翼)이 되었으나 진관(鎭管)체제로 개편되면서 비로소 진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크게 변모했는데 요충지라는 이유로 병마방어사를 겸하게 되고, 영장제를 채택하자 별중영장(別中營將)을 겸했다.

인조대에 창설된 총융청의 외영(外營)으로 있다가 정조대에 유수부로 승격되어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게 되었다. 순조대에 장용영(壯勇營)을 폐지하면서 총리사(摠理使)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소속 제진(諸鎭)들도 모두 다른 고을로 옮겼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목에서 부로 강등되었는데,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양광도의 계수관으로 정해졌다.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자 1395년(태조 4)에 경기좌도로 소속이 바뀌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바꾸고 경기도관찰사의 관아를 두었다.

1455년(세조 1)에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익도(軍翼道)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이 당시에는 부평도의 좌익으로 정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제도(諸道)의 중익(中翼)·좌익·우익(右翼)을 혁파하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을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때 비로소 수원진(水原鎭)이 성립되었으며, 부평·인천·금천·안산·남양(南陽)·진위(振威)·안성·양성(陽城)이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대개 앞서 부평도에 속했던 여러 고을들로 편성되었다.

1466년(세조 12) 판관(判官)의 설치와 더불어 전에 속했던 제진들을 축으로 해서 주변의 몇몇 고을들이 추가되었으며, 그 결과가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3품의 수원도호부사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되, 그에 소속된 부평·남양·인천에서는 부사가, 안산·안성에서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수원판관과 진위·양천·용인·금천에서는 현령이, 양성·통진(通津)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여 지휘를 받았다. 대체로 경기도 남서부 일대의 제진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는데, 중위(中衛)였던 의흥위(義興衛)의 중부(中部)에 속하였다.

변천

임진왜란을 계기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밖으로 양호(兩湖), 즉 호서와 호남을 막고 안으로 한양을 보호하는 요충지라는 이유로 방어의 중진(重鎭)을 설치하고 부사가 겸임하게 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어서 1602년(선조 35)에 실현되었다. 이는 관내에 있는 독성(禿城)산성 방어의 중요성도 한몫했다.

이를 계기로 부사가 병마방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또한 영장제(營將制)까지 도입되면서 여러모로 달라졌다. 먼저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을 전임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 수령의 군사 지휘권을 이양받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는데, 수원의 경우 무신 출신이 임명되지 않았으나 방어사를 겸했다는 이유로 파견되었다(『인조실록』 7년 11월 22일). 그러나 유지하는 데 따른 비용이 크다는 이유로 1637년에 혁파했다. 병자호란 후에는 수령이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행했는데 1668년(현종 9)에 별중영장을 겸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도성의 방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1624년(인조 2) 총융청을 설치하여 경기도병마절도사를 대신해 경기도 병력을 거느리게 했는데, 얼마 뒤 수원도 속하게 되었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1687년(숙종 13)에 남양(南陽)을 남한산성으로 소속을 옮기고, 삼영제(三營制)로 개편하면서 총융좌영장(摠戎左營將)을 겸하게 했다. 그리고 마병(馬兵)별효위(別驍衛)를 1755년(영조 31)에 설치하였다.

1793년(정조 17) 유수부로 승격시켜 부사를 유수로 올리고,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시키면서 판관을 두어 보좌하게 했다. 외영(外營)으로 용인·진위·안산·시흥·과천 등의 5읍 군병을 차례로 소속시켰다(『정조실록』 22년 10월 19일). 1802년(순조 2)에 장용영이 혁파된 후 장용외사를 총리사(摠理使)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소속 제진들도 모두 다른 고을로 옮겼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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