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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와 부여군으로 분리된 석성 지역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석성현(石城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설립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395호, 인구가 1,208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1명, 수호군(守護軍) 23명, 선군(船軍) 150명이었다. 토지는 2,449결인데, 논과 밭이 절반씩 차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석성군으로 승격하였다.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땅을 나누어 논산군과 부여군에 소속시키고, 그 중심지에 석성면을 두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석성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석산현으로 고쳤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부여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가 건국한 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석성현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공주의 임내로 두었으며, 1172년(고려 명종 2)에 처음 감무(監務)를 두었다. 뒤에 감무를 폐지하고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부여감무(扶餘監務)가 겸임하게 하였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 1414년(태종 14)에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인 이산현(尼山縣)에 합쳐서 이성현(尼城縣)으로 고쳤다. 1415년(태종 15)에 고다진(古多津)으로 통하는 요충지라 하여 다시 현을 설치하고 현감을 두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자를 파견하는 지역이 되었다. 『여지도서』의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좌수 1명, 별감 1명, 군관 30명, 아전 20명, 지인 10명, 사령 19명, 관노 24명, 관비 23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도 행정단위에 변화가 없었다. 석성현은 9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에 의하면 편호 1,911호, 남자 3,813명, 여자 4,596명이었다. 토지는 밭 460결 85부 3속, 논 1,291결 23부 6속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석성군으로 승격하고 공주부의 관할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02년(고종 39)의 『석성군양안(石城郡量案)』에 의하면 민호는 1,745호, 토지는 1,659결 64부 3속이었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땅을 나누어 논산군과 부여군에 소속시키고, 그 중심지에 석성면을 두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석성군양안(石城郡量案)』
  • 『석성현읍지(石城縣邑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