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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성균관과 8도 계수관 향교의 대성전 동쪽에 있는 여러 유현(儒賢)의 위패가 안치된 행각.

개설

동무는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文廟) 안에 정전인 대성전에 배향하지 못한 유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서쪽에 세운 건물은 서무(西廡)라고 한다. 여러 도의 계수관(界首官)향교에는 동무와 서무가 있었으나, 그 나머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향교에는 모두 무가 없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와 조선시대 문묘에서 정전인 대성전에 모시는 공자와 사성(四聖), 십철(十哲), 송조(宋朝)의 육현(六賢) 외의 선현(先賢)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를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동무에는 역대 중국 성현을 앞쪽에 모시고, 설총(薛聰)·안향(安珦)·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 등 9위를 뒤쪽에 모셨다.

조직 및 역할

동무에는 공자의 여러 제자 및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유현 55위의 위패를 모셨다. 초하루와 보름의 분향 때 동무에 수복(守僕) 한 사람이 배치된다. 석전(釋奠) 제사 때는 촛불을 밝히고, 어린아이 주먹만 한 생육(生肉) 한 덩어리와 포(脯) 세 가닥 그리고 잔과 받침 한 개의 간단한 전물(奠物)을 올린다.

변천

1461년(세조 7) 상정소(詳定所)의 건의에 의해 문묘의 각 위(位)에 올리는 전물을 모두 탁자를 써서 진설하게 하고 바닥에 자리를 펴는 것은 없애도록 할 때[『세조실록』 7년 2월 3일] 서무와 함께 동무도 이에 따라 진설되었다.

1610년(광해군 2) 9월 4일에는 증(贈) 의정부 우의정문경공(文敬公)김굉필(金宏弼), 증 의정부 우의정문헌공(文獻公)정여창(鄭汝昌), 증 의정부 영의정문정공(文正公)조광조(趙光祖), 증 의정부 영의정문원공(文元公)이언적(李彦迪), 증 의정부 영의정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의 다섯 유현을 문묘의 동무와 서무에 추가로 배향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5일). 1756년(영조 32) 2월 15일에는 다시 문정공(文正公)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송준길(宋浚吉)을 문묘의 동무와 서무에 배향하였다(『영조실록』 32년 2월 15일).

1791년(정조 15)에는 태학 동무에 봉안한 문정공송시열(宋時烈)과 문순공(文純公)박세채(朴世采)의 위판 순서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앞서 개수를 하고 다시 봉안할 때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 일을 담당한 유생은 무기한 과거 응시를 금하는 정거(停擧)의 벌을 받았다[『정조실록』 15년 8월 5일].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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