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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강릉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영동 지방의 수부인 강릉 지방을 통치하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강릉은 고려시대인 936년(고려 태조 19)에 동원경(東原京)으로 편제되었다. 이것은 고려의 호족연합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던 명주(溟州) 호족의 역할이 반영된 편제였다. 이후 중앙 정부의 지방통치 체제의 변경에 따라 강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읍호가 변경되었으나 행정구역의 변화는 없었다. 고려시대에 강릉은 외관이 파견된 주읍(主邑)으로서 2개의 속현을 관할하였는데, 하나는 연곡현(連谷縣)이고, 하나는 우계현(羽溪縣)이었다. 이러한 체제는 고려시대 전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고려 말에 강릉은 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 편제는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강릉은 여전히 2개의 속현, 즉 연곡현과 우계현을 관할하였다. 이 2개의 속현은 중앙 조정의 직촌화(直村化) 정책에 의거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면리 체계에서 면 단위로 편제되었다. 강릉은 갑오개혁 이후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23부제에서 강릉부로 편제되었고, 13도제에서 강원도 산하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릉의 지역 공동체로서의 입지는 이미 고대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강릉 지방은 고구려 때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주(河瑟羅州)로 편제되었고, 신라 선덕왕 때 소경(小京)이 설치되고 사신(仕臣)이 배치되었다. 658년(신라 무열왕 5)에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는 이유로 주(州)로 고치고 도독(都督)을 두어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도록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명주(溟州)로 고쳤다. 이러한 양상은 이 지역이 당시 변방의 주요 거점도시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에 강릉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동원경이 되었다. 호족연합 정권으로서 성격을 지닌 고려 조정에서 강원도 지역의 거점도시 기능을 중시한 편제였다. 983년(고려 성종 2)에 하서부(河西府), 986년(고려 성종 5)에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 992년(고려 성종 11)에 명주목(溟州牧)으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로 고쳤다가 그 후에 다시 방어사(防禦使)로 개칭하였는데, 고려 조정의 군사적 기능을 중시한 편제 개편이었다. 1260년(고려 원종 1)에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강릉부(江陵府)로 고쳤고,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강릉대도호부로 존속되었으며 세조 때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鎭管) 체제에서 도호부 2개 즉 삼척과 양양, 군 4개 즉 평해·간성·고성·통천, 현 2개 즉 울진과 흡곡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현종대에 강상(綱常)을 범한 죄로 읍호가 강등되었다가 승격된 적이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 강릉에는 부사(府使)·판관(判官)·교수(敎授) 각 1인을 배치하였다. 목민관으로 부사는 3품의 당상·당하관을 배속하였고, 향청(鄕廳)에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3인을 배치하였다. 6방(六房) 관속으로 군관(軍官) 30인, 아전(衙前) 50인, 지인(知印) 20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21명, 군뢰(軍牢) 4명, 관노(官奴) 20명, 관비(官婢) 6명, 기생(妓生) 15명을 두었다. 판관과 교수는 가정(嘉靖) 연간에 폐지되었다.

강릉의 읍치에는 54칸의 객사(客舍), 56칸의 아사(衙舍), 8칸의 향청, 8칸의 장관청(將官廳), 5칸의 군관청(軍官廳), 10칸의 작청(作廳), 10칸의 군기(軍器)가 배치되었고, 6방 관속이 이곳에 배치되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후대에 이르면서 균역법이나 대동법과 같은 부세제의 개편에 따라 관아 건물이 증가하였다.

변천

강원도는 도내에서 읍세(邑勢)가 가장 큰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를 합성하여 이름 지어졌다. 강릉은 대도호부로 존속되었으나 1666년(현종 7)에 강릉에서 강상죄가 발생하여 강릉현으로 강등되었고, 이에 따라 강원도가 원양도(原襄道)로 개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 7년 2월 2일). 1791년(정조 15)에 강릉현감을 강릉대도호부사로 복호하였고(『정조실록』 15년 1월 2일), 원양도도 다시 강원도로 복호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춘천부와 강릉부로 나뉘었다. 강릉부는 동해안 일원의 9개 고을, 즉 강릉군·울진군·평해군·삼척군·고성군·간성군·통천군·흡곡군·양양군을 관장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다시 13도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가 다시 복원되었으며, 강원도는 26개 군으로 강릉은 그 일원으로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릉문화원, 『강릉시사』상, 강릉시사 편찬위원회, 1996.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
  • 강원도·명주군, 『명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관동대학교박물관, 1994.
  • 문화재관리국·강릉시,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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