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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원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경원부(慶源府)는 1398년(태조 7)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원군(慶源郡)으로 변경되기까지 함경도 북부 지방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진관(鎭管) 체제에서 경원진관(慶源鎭管)의 거진(巨鎭)으로, 장관인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와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중시된 지역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당(唐)나라가 한때 지배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지역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당시 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女眞) 등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다. 원(元)나라가 멸망하고 두만강 하류까지 고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경원 지방과 지금의 경흥(慶興) 지방을 합쳐 공주(孔州) 혹은 광주(匡州), 추성(楸城)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8년(태조 7)에 옛터에 돌로 성을 쌓았다. 같은 해 동북면(東北面)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이름을 나누어 정할 때 지금의 이름인 경원(慶源)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태조실록』 7년 2월 3일). 고을의 이름을 ‘경원’으로 한 것은 이 지역에 목조(穆祖)와 그 비(妃)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고, 또한 왕업의 터전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이었다. 경성(鏡城)에서 용성(龍城) 이북을 떼어 내 편입시켰다.

조직 및 역할

부사(府使)는 조선전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3품으로 규정되었지만,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정3품의 문관이나 무관으로 임용하였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진관 체제 아래의 거진으로 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였고, 조선후기에는 토포사도 겸하였다. 온성(穩城), 경흥(慶興)의 두 부(府) 및 소속 진보(鎭堡)를 관할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목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병방군관(兵房軍官) 2명, 군관(軍官) 30명, 아전(衙前) 70명, 지인(知印) 20명, 사령(使令) 25명, 군뢰(軍牢) 32명, 관노(官奴) 42명, 관비(官婢) 25명이 있었다.

남쪽 지방과 달리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토관(土官)으로 몇 개의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다. 경원의 토관직으로는 도할사(都轄司)에 종6품의 도할(都轄)과 정7품의 전사(典事) 각 1원을 두었으며, 전례서(典禮署)에 종6품의 감부(勘簿), 종8품의 급사(給事), 종9품의 섭사(攝事) 각 1원을 두었다. 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에 종7품의 장사(掌事)와 종9품의 섭사 각 1원을 두었으며, 전주국(典酒局)에 급사·섭사 각 1원을 두었다. 그리고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1원을 두었다. 이상은 문관으로 관찰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이 밖에 무관 토관직도 설치되었는데, 절도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회원위(懷遠衛)에 정6품의 여과(勵果), 종6품의 부여과(副勵果), 정7품의 여정(勵正), 종7품의 부여정(副勵正) 각 1원, 정8품의 여맹(勵猛) 2원, 종8품의 부여맹(副勵猛) 3원, 정9품의 여용(勵勇) 4원과 종9품의 부여용(副勵勇) 5원을 두었다. 토관이 경관(京官)으로 임명될 때에는 문반과 무반 모두 1품계를 강등하여 적용하였다. 토관은 퇴관(退官)할 차례가 되었어도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퇴직하였다.

경원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여지도서』에 13사(社)가 소개되어 있다. 관아가 소재한 읍사(邑社)를 위시하여 훈융사(訓戎社), 솔하사(乺下社), 성천사(城川社), 농포사(農圃社), 안원사(安原社), 동림사(東林社), 고건원사(古乾元社), 신건원사(新乾原社), 고아산사(古阿山社), 신아산사(新阿山社), 유신사(有信社), 해진사(海津社)가 있었다.

변천

1409년(태종 9)에 읍치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영(營)으로 옮겨 설치하고, 목책(木柵)을 만들어 거주했다. 1410년(태종 10)에 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민호를 모두 경성으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 두는 한편, 경원군의 읍치도 경성에 병설하였다. 1417년(태종 17)에 다시 지금의 부령군(富寧郡) 부거(富居)에 위치한 부가참(富家站)에 읍치를 설치하고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를 회복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옛터가 있던 소다로 북쪽의 회질가(會叱家)로 치소를 다시 옮기고 남쪽 지역의 백성을 이주시켜 채웠으며, 판관(判官)과 토관을 두었다. 이때 예전에 공주에 속했던 경흥 지방을 분리하여 공성현(孔城縣)이라 하였다가, 뒤에 경흥군(慶興郡)으로 승격시켰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경성부(鏡城府) 소속의 경원군으로 바뀌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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