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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6 기준 최신판



임진왜란 중 선릉과 정릉(靖陵)을 도굴한 일본인을 일컫는 용어.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나고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조선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선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가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사실과 함께, 성종과 정현왕후의 묘소인 선릉, 중종의 묘인 정릉이 전쟁 중 도굴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인들은 이와 같은 도굴이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의 국교재개 요청이 있자 도굴범의 소환을 강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웠다.

역사적 배경

1592년 12월 일본군은 강릉(康陵)과 태릉(泰陵)의 도굴을 시도한 바 있다. 조선의 능침(陵寢)에는 금과 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선조실록』26년 1월 22일). 이어 일본군은 기자(箕子)의 묘도 도굴하려다 실패했다(『선조실록』26년 1월 24일). 1593년 1월 예조는 원(園)과 능(陵)이 파헤쳐진 곳이 많다며 보수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선조실록』26년 1월 27일).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한 도굴은 광범위하게 행해진 것 같다.

조선 조정에서 선릉과 정릉의 도굴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1593년 4월 경기좌도관찰사성영(成泳)의 보고를 통해서였다(『선조실록』26년 4월 13일). 이후 선왕과 왕후 시신에 대한 조사와 함께 왕릉 개수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선릉의 개장은 1593년 7월 27일(『선조실록』26년 7월 27일), 정릉의 개장은 1593년 8월 15일 이루어졌다(『선조실록』26년 8월 15일).

발단

대마도(對馬島)는 일본군의 철수와 거의 동시에 조선과의 강화를 요청하였다. 재정의 대부분을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대마도로서는 조선과의 국교정상화가 섬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피로인(被擄人) 송환과 함께 조선에 대한 재침 가능성을 흘리는 강온양면책을 전개하였다.

1600년 4월 대마도는 조선과의 강화가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뜻임을 조선 정부에 알려왔다(『선조실록』 33년 4월 14일). 이후 대마도는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덕천가강이 강화의 전권을 대마도에 위임했다며 강화 요청이 일본 중앙정부의 뜻임을 강조했다.

일본의 국교재개 요청에 대해 조선 조정은 지속적인 논의 끝에 1604년(선조 37) 7월 사명대사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 등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확인토록 하였다. 유정의 일본 사행을 계기로 조선의 대일외교는 대마도에서 덕천막부(德川幕府)로 대상을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유정의 귀국 후에도 조선과 일본의 국교재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덕천가강은 유정에게 강화를 원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국서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정 등이 귀국한 후에도 대마도는 1605년 11월, 1606년 정월과 4월 다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재촉하였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강화의 조건으로 덕천가강이 강화를 요청하는 서한을 먼저 보낼 것[先爲致書]과 전쟁 중 왕릉을 파헤친 일본군을 압송해 올 것[犯陵賊縛送] 두 가지 조건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은 1606년 8월 전계신(全繼信)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경과

1606년(선조 39) 11월 대마도는 조선이 요구한 덕천가강의 국서와 함께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조선에 보내왔다(『선조실록』39년 11월 12일). 그러나 도굴범으로 조선에 넘겨진 마고사구(麻古沙九)와 마다화지(麻多化之)는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부인했다(『선조실록』39년 11월 17일). 조선에서도 이 두 사람이 왕릉의 도굴범이 아님을 알았지만 이들을 참형에 처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선조수정실록』39년 11월 1일).

1607년 1월 조선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파견하였고, 조선 사신 일행은 5월 6일 강호(江戶)에서 덕천가강의 아들로 새로 장군(將軍)이 된 덕천수충(德川秀忠)을 만나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이루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재개에 있어 중요한 요구 사항 중 하나는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 소환이었다. 조선의 요구는 받아들여졌지만, 대마도에서 보낸 이들은 범인이 아니었다. 조선도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항복(李恒福)은 대마도에서 보낸 도굴범을 부산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일본 사신에게 줄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이항복은 대마도에서 가짜 도굴범을 보낸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항복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도굴범의 진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조선이 대일강화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조선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통해 명분론을 확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민덕기, 「임진왜란 이후의 조·일강화교섭과 대마도(2)-교린·기마질서(交隣·羈縻秩序)의 재계를 중심으로-」, 『사학연구』40, 한국사학회, 1987.
  • 방기철, 「임진왜란 후 조·일간 국교재개 과정 연구」, 『군사』84, 2012.
  • 中村榮孝, 「江戶時代の日鮮關係」, 『日鮮關係史の硏究』下,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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