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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 일본이 조선 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

개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청국은 정치, 군사적으로 일본을 압도하는 위치였다. 청국은 당시 아시아 제일 함대라는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소유하였으며, 군병력의 수로는 일본이 상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육군과 해군을 창설하였다. 일본 육군은 1873년(고종 10)에 서양식의 징병 군대를 창설하였다. 1890년대 일본은 서양식으로 훈련되고 장비가 잘 갖추어진 육군을 운용하였다. 일본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였다. 영국 해군 교관의 연습과 지도로 일본은 포술과 조종술에 능한 해군을 보유하였다. 또한 주요 군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조선소에서 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890년대의 일본은 더 이상 청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시아의 군사대국이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고종실록』 31년 5월 1일). 청국은 천진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도 알렸고 이를 틈타 일본도 병력을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 군대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6월 9일 인천에 상륙한 뒤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조선의 내각을 친일인사로 교체하면서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고종실록』 31년 6월 21일). 이때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 군대의 진주에 따라 조선이 청일전쟁의 전장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전주성에서 해산함으로써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는 명분을 주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내에서 우위를 점하고 청나라 세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고 추가 병력을 계속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홍장은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을 통해 양국 간 중재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7월 25일에 일본 함대가 조선에 파견되던 청국 함대를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아산만에서 청군을 격파한 뒤에 파죽지세로 평양과 압록강 연변의 구련성(九連城)을 점령하고 만주까지 진출하였다. 일본은 청국이 전세를 장악하고자 파견한 북양함대를 격멸한 뒤 여순항을 점령하여 청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제거하였다. 일본군은 만주 공격 이후 위해(威海)의 청국 군항을 함락한 후 북경 인근까지 진출하였고 대만도 점령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식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군은 청국군 이외에 조선 내 동학농민군도 진압하여 한반도 내 반일세력을 전멸시키고자 했다. 특히 우금치 전투에서 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여 사실상 조선 내에 일본 세력을 구축하였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동북아시아에서는 청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질서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청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열강이 좌우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문호가 개방된 이후 서구 제국의 제국주의적 양태를 답습하여 조선을 개항시키면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일본은 유구(琉球, [류큐])를 강제로 복속한 이후 국내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잠재적인 불만세력을 국외로 돌리고자 했다. 그 결과 대만을 침략하고 조선에서 매번 청국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의 활동은 사실상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영국은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위협할 상대로 지목하고 러시아에 대항할 동맹세력으로 일본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서구 열강의 묵인하에 일어난 동아시아 강국이었던 청국과 일본의 대결장이었고, 그 피해는 조선이 당하는 현실이었다.

발단

1894년 조선 정부는 전라도 고부에서 발생한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진압하지 못하고 전주까지 점령당하였으며, 서울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청국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청군 개입 요청은 일본에게 침략 동기를 제공했다. 갑신정변의 정리 과정에서 청국과 일본은 천진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할 때 상대국에 그 사실을 통보하고 동시에 출병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청군의 파병은 곧 일본군의 등장을 의미했으며, 조선의 정국을 장악하려는 일본은 이 기회를 바탕으로 한반도 내 청국의 세력을 일소하고자 청일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경과

일본은 7월 25일 청국 군함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 초에 일본군은 충청도의 아산·공주와 성환(成歡) 등에서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때의 전투로 청군은 한양을 비롯한 남한에서 완전히 일소되었다. 일본군은 9월에 평양에 대부대를 결진하고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던 청군의 주력을 완전히 제압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이때부터 청국군은 계속 패전을 이어갔고 만주를 비롯한 잔존한 부대들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방군이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조선의 친청파를 일소하고 친일파를 부식하려고 갑오개혁을 기도했다. 또한 일본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재차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11월에 공주 공격을 개시하였다가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9월에는 청국이 최후의 결전으로 생각하여 파견한 북양함대의 주력이 일본군에게 격멸되면서 전쟁은 일본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당시 청국은 운남으로 침입하는 프랑스, 이리 지역의 러시아 등을 상대하면서 국력이 소진되고 분산되었으므로 일본을 상대하기에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하고 11월 6일 금주(錦州), 11월 22일 여순(旅順)을 점령하였다.

이홍장은 전쟁의 종식을 위해 1895년 1월 교섭을 시작했으나 실패하였고, 1895년 2월에 청국 본토의 주요 군항인 위해가 함락되자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서 본격적인 강화회담을 진행하였다.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양국은 조약문의 서두에서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내용은 조선 내 청국 세력의 일소와 동시에 일본 세력의 부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10일). 청국은 배상금 2억 냥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제도(澎湖諸島) 등을 할양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한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의 할양이 취소되고 조선 내 친러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왕현종,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실, 『청일전쟁을 전후한 한국과 열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강효숙,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조선병참부: 황해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51, 한국근현대사학회, 2009.
  • 구선희, 「청일전쟁의 의미 : 조·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3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 국사편찬위원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한국사』40, 국가기록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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