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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9 기준 최신판



궁중의 각사에서 비단이나 종이로 조화(造花)를 만드는 장인.

개설

조화는 실제 자연의 꽃이 아니어서 가화(假花)라고도 불린다. 조화는 만드는 재료나 형태 및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불린다. 재료에 따라 금[金花], 은[銀花], 구리[銅花], 납[蠟花], 비단[綵花, 絲花], 종이[紙花] 등이 있다. 용도에 따라 머리 장식용 조화, 행사 장식용 조화, 상차림용 조화 등으로 나눈다. 권화(圈花)는 예빈시(禮賓寺)에서, 사화봉(絲花鳳)내자시(內資寺)에서 제작하였다. 조선전기에 구리철사에 색실을 감아 꽃과 봉황의 형상을 만든 사화봉은 명나라 사신에게 베푼 연향에서만 쓰도록 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1719년 숙종 때의 잔치 때 왕과 왕비의 잔칫상을 장식하는 공작·대봉·중봉·백학과 같은 새와 초충이 있는 사화봉 25개를 내자시의 화장(花匠)이 마련하여 장식하였다. 반면 잔치에 참석하는 신하들의 상에는 예빈시의 화장이 마련한 1,546개의 권화를 지화로 장식하였다.

담당 직무

화장은 궁중의 잔치를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도감에 소속되어 행사에 필요한 조화를 제작하였다. 왕실 행사용 조화는 사용 방법에 따라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첫째, 왕실이나 국가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머리에 꽂는 장식용 조화가 있다. 이러한 조화는 잠화(簪花)·수화(首花)·수공화(首拱花)·권화(勸花)·권화·사권화(絲圈花)·홍도별간화(紅桃別間花) 등 다양하게 불린다. 1506년에는 연회 때 나인의 머리에 장식할 꽃을 화장들에게 만들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6월 12일). 1902년에는 연향 때에 신하들의 머리에 꽂는 조화[紅桃二枝花]는 외진연에 3,900개, 내진연에 4,000개를 제작하였다.

둘째, 연회용 음식을 차린 상에 꽂는 꽃인 상화(床花)는 사화(絲花)·채화(綵花)·지화(紙花) 등이다. 1414년 태종은 사치를 금지하면서 신하들의 상에는 종이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4년 12월 1일).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에는 상화를 종이꽃으로 대용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1601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향 때의 상화를 모시[白苧布] 100여 필로 제작토록 하였다. 1759년 영조는 왕세자의 혼례 때 검약을 실천하고자 동뢰연에 상화를 쓰지 말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5년 5월 7일).

셋째, 왕실의 의식 공간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큰 백자 항아리에 꽂는 꽃인 준화(樽花)가 있다. 준화의 연원은 오래이나 19세기 연향 때에 궁궐 전각마다 1쌍씩 배치하였다. 준화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은 1795년의 원행을묘 때부터이고, 1829년 순조의 4순과 즉위 30주년을 축하하는 연향에는 1기의 준화 외에 별가화(別假花)가 배치되었다.

넷째, 연회 시 여령들이 악가무를 공연하는 무대를 장식하는 용도로 지당판(池塘板), 연화대(蓮花臺), 화병, 모란화, 대연화통(大蓮花筒), 헌천화(獻天花) 등이 있다. 그 밖에 제공되는 행위에 따라 꽃을 뿌리는 산화(散花), 왕이 벼슬에 오른 신하에게 꽃을 내리는 사화(賜花) 등이 있다.

직역 분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시대 화장은 내자시, 예빈시, 봉상시(奉常寺)에 총 1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1469년 세조의 국상 때 명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에는 내섬시에도 화장이 있었다(『예종실록』 1년 윤2월 16일). 1505년에는 장악원 제조인 이계동(李季仝)과 임숭재(任崇載)가 기생들의 머리에 꽂을 꽃[首花]을 제작하기 위해 화장 3명을 장악원으로 소속시키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3일).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내자시에서는 왕의 상에 꽂을 조화를, 예빈시에서는 신하들의 상에 꽂을 꽃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화장의 업무를 관리 감독하는 관원은 수본별감과 수본고직이 맡았다. 1616년 10월 조화의 제작 비용 때문에 대전의 잔치에 사용하는 상화를 내전에 옮겨 사용한 것을 이유로 해당 관원을 추고하거나(『광해군일기』 8년 10월 16일), 1620년 조화를 거칠게 만든 것에 대해 해당 관원을 추고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광해군일기』 12년 3월 16일).

화장이 만든 조화를 상 위에 꽂을 때에는 그릇이 필요하며 이것을 만드는 장인이 바로 상화룡장(床花龍匠)이다. 이들은 선공감에 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변천

조화를 만드는 장인은 문헌상 고려 때부터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 때부터 고깔 모양의 모자인 절풍(折風)에 금꽃[金花]을 달아 장식하였던 기록이 있어 그 연원은 올라간다. 고려 때의 화장은 당시 왕실의 그릇과 보물[珍寶]을 담당하던 중상서(中尙署)와 왕실의 복식을 담당하던 상의국(尙衣局)에 각각 1명씩 두었다. 그들은 교위(校尉)라 하여 종6품부터 종9품에 해당되는 무산계에 해당되었다. 한편 공조서(供造署)에는 왕이 하사한 꽃을 담당하던 권화사(權花使), 꽃의 운반을 감독하던 압화주사(押花酒使), 꽃 가진 사람을 인솔하던 인화담원(引花擔員) 등의 관원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화의 수요가 늘면서 화장의 숫자가 늘었고 소속 관청도 많아졌다. 조선전기의 『경국대전』에는 화장을 내자시에 2명, 예빈시에 6명, 봉상시에 6명을 두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말기까지 이어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마찬가지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궁중의 꽃을 제작하던 관행은 민간에도 널리 퍼져 사찰이나 무속 행사 때에도 가화를 제작하여 장식하는 풍습이 널리 유행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 『진연의궤(進宴儀軌)』
  • 『수작의궤(酬酌儀軌)』
  • 『진찬의궤(進饌儀軌)』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황수로, 『아름다운 한국채화』, 노마드북스, 2009.
  • 박은주, 「조선후기 조화의 유형과 변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문, 2005.
  • 황수로, 「한국 假花의 종류와 특성」, 『문물연구』 12,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