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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궁중과 경향(京鄕)의 관아나 민간에서 옹기를 제작하는 장인.

개설

옹장(瓮匠)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甕匠 또는 瓮匠’으로 기재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에 세 곳의 ‘황옹(黃瓮)’만을 굽는 가마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104명의 옹기장이 14개의 중앙 부서에 소속되어 있으며, 「공전」 ‘공장’조에 경공장으로는 예빈시(禮賓寺)에 옹장 6명이 배치되었고, 외공장에는 충청도 임천의 황옹장 1명이 확보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담당 직무

옹장의 직무는 관수용과 민수용의 옹기를 제작하는 것이다. 주로 저장용의 각종 항아리와 병 등과 음식기명인 완(盌), 발(鉢) 등을 제작하였다. 제작 비용이 적게 들어 금기·은기와 사기보다 한층 떨어지는 그릇 자체의 계급적 지위처럼 장인의 지위 또한 낮았다.

이문건(李文楗)이 쓴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16세기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옹기 장인에 관한 내용이 있다. 특히 지방 장인이 관청에서 요구하는 일정량의 옹기를 어떻게 만들어 바치는지 그 절차에 관한 대목이 주목된다. 장인들은 지방관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기도 했지만,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일이 많았다. 또 숙종 시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모집한 군병 중 한량(閑良)으로 모집된 자 가운데 옹장으로 편입시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옹장이 다른 역에서 충원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숙종실록』 6년 12월 29일), 옹장은 농사를 짓는 소작을 때로 겸하기도 했으나 생활이 매우 어려웠고 천시를 받았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청자장과 옹장의 구분이 청자와 옹기의 구분처럼 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청자를 옹기로도 불렀는데 고려 충렬왕 시기에 원나라 황제에게 금화옹기(金畫甕器)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곧 금채청자(金彩靑瓷)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옹장과 사기장의 구분이 명확하여 혼돈해서 사용한 경우는 없다. 조선초기에 옹기장은 공조(工曹)와서(瓦署)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1603년(선조 36)의 기사를 살펴보면, 와서가 폐지된 뒤로 와서에 속하였던 옹장들의 대부분이 사간원(司諫院)으로 이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사간원에 속하게 된 옹장들을 다시금 공조로 이속시키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선조실록』 36년 7월 23일).

옹장은 사기장과 마찬가지로 포를 지급받았는데, 가포를 납부하는 자들이 점차 부족해지고, 또 정액 이상의 옹기 제작을 요구하는 등의 사건들로 인해 옹장들 역시 이탈하게 된다(『성종실록』 18년 2월 5일), (『정조실록』 13년 윤5월 22일). 영조 이래 시장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 등에 힘입어 수공업 생산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는데, 이는 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장인들이 집단 마을을 형성하여 공동 작업을 하거나 점촌을 이루어 공동으로 유통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9년 7월 16일). 이들이 전국에 어느 정도 분포하였는지는 순조 연간 서유구(徐有榘)가 지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묵재일기(默齋日記)』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강경숙, 『韓國 陶磁史』, 예경, 2012.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정양모, 이훈석, 정명호, 『옹기』, 대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