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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녕부(敦寧府)를 비롯해 각 관서에 소속된 종8품 관직.

개설

봉사(奉事)는 1466년(세조 12)의 관제 개정 당시 처음 등장하였으며, 시(寺)·사(司)·서(署)·원(院)·감(監)·창(倉)·고(庫)·궁(宮) 등 각 관사에 소속된 관직이다. 각 관서마다 설치 경위는 달랐다. 봉상시·선공감·훈련원의 경우 종래의 녹사(錄事)를, 관상감의 경우 종래의 시일(視日)을, 사역원의 경우 종래의 부직장(副直長)을, 풍저창의 경우 종래의 부승(副丞)을 각각 봉사로 개칭하였다. 돈녕부와 내섬시·내자시의 경우에는 관제 개정 때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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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는 동반(東班)의 돈녕부·봉상시·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 등과 서반(西班)의 훈련원 등의 관서에 설치되었다. 종7품 관직인 직장(直長)이나 정7품인 참군(參軍)으로 올라가는 전 단계의 관직이었다.

담당 직무

봉사는 각 관서의 주요 실무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풍저창 봉사는, 풍저창 수(守) 등과 함께 도둑 등에 대비하여 창고의 미곡을 관리하였다(『예종실록』 1년 7월 9일). 내의원 봉사는 약재를 관리하는 등 소속 관서의 실무를 맡아 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윤3월 18일). 이 밖에도 각 관서 부속의 소속 기관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선공감 봉사는 자문감(紫門監)에 보내져 일하거나(『연산군일기』 3년 10월 29일), 부역군의 감독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26일).

변천

『경국대전』 반포 이후 연산군대에는 장악원과 상서원·종부시 등의 관서에 봉사가 신설되었고, 군기시나 봉상시·군자감 등에는 1~2명이 추가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 단계에서는, 돈녕부와 종묘서의 봉사는 혁파되었고, 전의감과 사역원의 봉사는 1명씩 줄었다. 풍저창이나 사온서·전옥서는 관서 자체가 다른 기관으로 합쳐지면서 관직 역시 소멸되었다. 이와는 달리 선공감에는 1명이 증원되었고, 사재감과 장원서는 1명이 신설되었으며, 한성부 소속의 오부(五部)에도 각 부마다 1명씩 새롭게 설치되었다. 오부 소속 봉사의 경우는 1744년(영조 20)부터는 중인(中人)과 서얼(庶孼)층도 진출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정조대에 편찬된 『대전통편』에서는 사도시와 경모궁에 각 1명씩 신설된 반면 평시서와 전생서·예빈시 등에서는 혁파되었다. 이 밖에도 숙릉(淑陵)과 의릉(義陵)·순릉(純陵)을 비롯해 기자(箕子)를 모시는 평양의 숭인전(崇仁殿) 등에도 봉사 1명씩을 배치하였다.

고종 연간인 1869년(고종 6)에 종친부와 돈녕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봉사직에도 변화가 있었다. 즉, 품계는 정8품으로 규정되고 종친부 봉사는 왕의 서자(庶子)인 왕자군(王子君)의 서중자(庶衆子)가 처음으로 제수받는 관직이었다. 15개월이 지난 다음에는 다른 관청으로 차례대로 옮겨주며 품계를 올려주었다. 돈령부 봉사는 후궁의 딸인 옹주(翁主)의 사위와 왕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의 아들, 왕손(王孫)의 사위, 왕자군의 첩의 사위에게 처음으로 제수하는 관직으로 규정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다시 한 차례 변화가 있었다. 그리하여 종친부 봉사는 대군의 현손(玄孫), 왕자의 증손, 적왕손의 증손, 왕손의 여러 손자들에게 처음으로 제수하는 관직으로 규정되었다. 임기가 차면 다른 관직으로 옮겨주고[遷轉] 해당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워두도록 하였다. 돈녕원 봉사도, 왕자의 여러 사위들, 왕손의 사위들이 제수되는 관직으로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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