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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능행(陵幸), 왕실의 장례·잔치 등에서 장막을 설치하고 거두는 일을 담당한 군인.

개설

장막군은 1729년(영조 5) 1월 『승정원일기』의 기사 등에서 확인되지만,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장막군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장용영 등 각 군영에 설치되어, 왕의 능행과 왕실의 장례·환갑잔치 등에서 장막을 설치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장막군에게 죽 등의 음식과 상을 줌으로써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장막군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 등이 여러 차례 변화하였는데, 맨 마지막으로 호위국(扈衛局)에 소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즉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장막군은 장용영에 52명을 비롯하여(『순조실록』 2년 2월 7일), 1808년(순조 8) 편찬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용호영에 10명, 훈련도감에 복마군 17명 포함 61명, 금위영에 복마군 13명 포함 40명, 어영청에 복마군 8명 포함 51명’이 설치되었다. 고종대 무위소에도 장막군 30명이 설치되었는데 ‘서자지[書字的]를 담당한 겸사복(兼司僕) 1명, 패두(牌頭) 1명, 대장(隊長) 1명을 포함하여 1번(番) 10명, 2번 9명, 3번 9명’으로 구성되었고, 모두 서울 사람이었으며 패두와 각 번 군인은 양인(良人)이었다.

장막군은 왕의 능행 및 왕실의 장례·잔치 등에서 장막을 설치하고 거두었다. 실제로 1731년 영조의 장릉(長陵) 행차 때 고양군 숙소(宿所)에 어영청 소속 장막군 11명이, 1729년(영조 5) 왕세자 및 1752년 현빈(賢嬪) 발인(發靷) 때 훈련도감 장막군 70명이 주정소(晝停所)와 묘소에 장막을 설치하고 거두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의 환갑 진찬례(進饌禮) 때 장용영 장막군 47명이 연희당에 장막을 설치했으며, 통위영 장막군은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의 진압에도 참여하였다.

정부는 장막군에게 죽 등의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 총 쏘기를 시험한 후 쌀 2말이나 무명 1필 등을 상으로 주었다. 매월 시행하던 중순(中旬)의 시험이나 서총대(瑞蔥臺)에서 시행하던 조총 쏘기 시험에서 합격하는 자에게는 포(布)·무명을 주거나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장막군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변천

장막군은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는 물론이고, 장용영 장막군이 1787년 13명에서 1793년 50명으로 늘어난 것처럼 정원 등에도 변화가 있었다. 특히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 군대가 모두 폐지된 후 협련군(挾輦軍)·협여군(挾轝軍) 등의 임무는 ‘공병대→호위군→호위대→호위국’으로 이속되었는데, 1907년 5월 18일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 기부자에 호위국 소속 장막군 51명의 성명이 기재된 것에서 장막군의 최종 소속처가 호위국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장막군은 1907년 군대 해산 때 호위국과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만기요람(萬機要覽)』
  •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장막군안(帳幕軍案)』
  • 『동학란기록(東學亂記錄)』 하(下)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 제도』, 혜안, 2000.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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