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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던 성균관(成均館)의 정3품 당상관 관직.

개설

반장(泮長) 혹은 사장(師長)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사성(大司成)은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해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관제 반포 때 설치되었다. 다만 이때는 정3품 당하관이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당상관으로 승격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교육을 전담하였을 뿐 아니라 시관(試官)이 되거나 강론(講論)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특정 성관(姓貫) 출신자에게 집중되거나, 거주지도 서울이나 경기, 충청도 등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다.

담당 직무

대사성은 전국 유생의 사표(師表)로 인식되던 존재로(『세종실록』 14년 3월 18일), 성균관 유생의 교육을 총괄하였다. 따라서 그 자격 요건이 엄격하였는데, 문과 출신자 중 경학(經學)에 정통하면서 어질고 덕이 있는 자, 그리고 나이가 많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5년 3월 19일). 단, 세종조에 대사성을 역임한 강석덕(姜碩德)처럼 문과 출신이 아니면서 대사성에 제수된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다.

해당 조건을 갖춘 자를 대상으로 임용하여 사유록(師儒錄)을 작성하는데, 사유록은 의정부와 이조, 관각당상(館閣堂上) 등이 모여 의논해서 사유에 적합한 자를 선정하여 작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록은 당시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모범이 될 만한 자들의 명부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등재된 자들 중에서 대사성이 차출되었다.

대사성은 유생의 교육 이외에도 국왕이 참석하는 자리에 나아가 유교 경전 등을 강론하기도 하였고(『태조실록』 1년 9월 21일), 경연의 특진관(特進官)으로 참석하기도 하였으며(『성종실록』 20년 12월 2일), 시관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2년 2월 10일). 대사성은 또한 지성균관사 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의 고과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고과 당일에 지성균관사와 대사성이 함께 논의해서 관원들의 등급을 정해 기록한 뒤 고과를 최종적으로 담당하는 예조에서 다른 관서들과 함께 포폄할 때 서명한 뒤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변천

고려말 성균관의 정비 과정에서 겸대사성(兼大司成)이 설치된 적이 있다. 이후 대사성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7월 문무 관제를 반포할 때 성균관의 소속으로 설치되었다. 정3품 당하관이었으며, 정원은 1명이었다. 이후 1466년 1월 관제 개편 때 정3품 당상관으로 올렸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한편 유생의 교육을 위해 학술이 뛰어나고 재덕(才德)을 갖춘 인물을 겸대사성으로 제수하여 날마다 성균관에 나아가 학생들을 교육시키도록 하였고(『태종실록』 12년 8월 24일), 중국 사신이 문묘를 배알할 때 임시로 가대사성(假大司成)을 차출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7년 3월 23일).

조선초 성균관이 설치된 이후 1894년(고종 31) 성균관이 크게 개편될 때까지 대사성 역임자는 1,249명 정도로 파악된다. 이들은 전주이씨나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 등 특정 성관 출신이었으며, 출신 거주지도 대개 서울이나 경기, 충청도 등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전반기까지는 집안 세력이 미약한 성관도 대사성에 진출하였으나 이후에는 특정 집안에 집중되는 양상이 심화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태학지(太學志)』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 정낙찬,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의 자격 및 자질·임명·임기·대우」, 『인문연구』 17-1,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5.
  • 정덕희, 「조선시대 성균관대사성의 출신배경 실태」, 『조선시대사학보』 45, 조선시대사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