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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부경사행(赴京使行)과 통신사행(通信使行)에 수행하여 실무를 담당하던 역관의 하나.

내용

상통사에 관한 기록은 성종대부터 확인할 수 있으나, 당시의 지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통문관지』에 의하면 조선후기 부경사행(赴京使行)에는 한학(漢學)과 청학(淸學) 각 1명씩 2명, 통신사행(通信使行)에는 한학 1명과 왜학 2명의 상통사가 수행하였다. 이때 상통사들은 사행 중의 공간(公幹)과 예단, 왕실을 위한 무역을 담당하였다.

상통사 선발은 부경사행의 경우 20명의 한학 상통사와 10명의 청학 상통사 중에서 차례대로 안배하여 보냈다. 통신사행에는 왜학(倭學) 역관 중 교회(敎誨)를 뽑아 직임을 맡아 보게 하였다가, 1682년(숙종 8) 민정중(閔鼎重)의 건의에 따라 한학 역관 1명과 왜학 역관 2명을 임명하여 보내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통신사행 때 한학 상통사는 일본인 중 중국어를 아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거나 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문화 교류의 폭을 넓히고, 무역 혹은 중국 표류민(漂流民)에 관련된 일이 있을 때에 정보 탐지나 외교 교섭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용례

命召領敦寧以上 議張有華金渚陞授堂上可否 沈澮尹弼商盧思愼議 鄭同 前日多方求請 未得盡遂其欲 含憤而生事萬端 今因我國喜事 奉命而來 其意必以爲 所欲無不遂 同 奸黠小人 憑恃城社 不可以待君子之道 待之 其所請 若非大害事理 當黽勉從之 張有華爲上通事 已經准職 歷仕已久 從請爲便(『성종실록』 14년 6월 18일)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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