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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대표표제=겸도사|한글표제=겸도사|한자표제=兼都事|대역어=|상위어=경력(經歷), 도사(都事), 참하관(參下官)|하위어=|동의어=|관련어=가도사(假都事), 충훈부(忠勳府)|분야=정치/행정/관직·관품|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근호|제정시기=1481년(성종 12)|폐지시기=조선말기|소속관서=감영(監營)|관품=종오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1487|실록연계=}}
  
조선후기 공신 관련 사무를 관장하던 충훈부(忠勳府) 소속의 종5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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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일시적으로 관찰사 소속으로 두었던 종5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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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개설'''==
  
1865년(고종 2) 7월 홍종서(洪鍾序)의 건의가 관직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홍종서는 공신 적장자들이 낭관(郎官)이나 수령 등을 지냈는데도 더 이상 진출할 수 있는 관직이 마련되지 않아 관직 임용에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존 가도사(假都事)를 겸도사로 개칭하여 제수하자고 하였다. 홍종서의 상소가 제출된 다음 날 이병희(李秉羲)가 처음으로 겸도사에 제수되었다. 정원은 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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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소속으로 겸도사(兼都事)가 처음 거론된 것은 1481년(성종 12) 8월이었다. 당시 전라도에 농사 상황이 좋지 않아 구황 전담을 위해 겸도사를 파견하려 했었다. 이때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경상도·황해도·평안도에 각 1명씩의 겸도사를 파견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그러나 겸도사는 자율성이 없어 관찰사의 통제를 받게 되므로 실제로 구황을 하지 못할 것이라거나, 각 지방에서 겸도사의 물품 비용을 대는 것이 어렵다고 하여 파견 대상 지역이 평안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평안도에 파견된 겸도사도 같은 해 12월에 혁파되었다.
  
 
=='''담당 직무'''==
 
=='''담당 직무'''==
  
충훈부겸도사는 소속 장이 추천하여 임명하는 자벽과(自辟窠)로, 수령이나 경관직(京官職) 6품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추천[擬望]하였다. 임기는 30개월로, 이를 마치면 차례대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였다. 임무는 도사와 함께 관서의 제반 서무를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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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소속 겸도사는 주로 구황과 같은 특별 임무를 수행하거나, 관찰사 업무의 일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66년(고종 3) 7월 평안도 지역의 과거시험에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초시 실시 예정일이 칙사의 행차와 같았다. 감사는 칙사의 행차를 맞이해야 하므로, 대소과 초시의 주관을 위해 용강현령유초환(兪初煥)을 겸도사를 차출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변천'''==
 
=='''변천'''==
  
기록상으로는 1865년의 설치 이후 1889년(고종 26)까지 윤우영(尹宇榮)이 겸도사에 제수된 것이 확인된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임용되다가 1894년 충훈부가 기공국(記功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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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연간 이후 겸도사가 다시 부각된 것은 중종 때이다. 1508년(중종 3) 경기감영에서 중앙으로 올리는 진상품의 봉헌을 위해 군직(軍職)에 있거나 [[무록관(無祿官)]]인 [[별제(別提)]]를 겸도사에 제수하자고 하였다. 밖에도 함경도 지역의 구황 전담을 위해 겸도사를 파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설치 여부는 알 수 없다. 이후 고종 연간에도 겸도사가 한때 설치된 적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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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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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판



조선시대 일시적으로 관찰사 소속으로 두었던 종5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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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관찰사 소속으로 겸도사(兼都事)가 처음 거론된 것은 1481년(성종 12) 8월이었다. 당시 전라도에 농사 상황이 좋지 않아 구황 전담을 위해 겸도사를 파견하려 했었다. 이때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경상도·황해도·평안도에 각 1명씩의 겸도사를 파견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그러나 겸도사는 자율성이 없어 관찰사의 통제를 받게 되므로 실제로 구황을 하지 못할 것이라거나, 각 지방에서 겸도사의 물품 비용을 대는 것이 어렵다고 하여 파견 대상 지역이 평안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평안도에 파견된 겸도사도 같은 해 12월에 혁파되었다.

담당 직무

관찰사 소속 겸도사는 주로 구황과 같은 특별 임무를 수행하거나, 관찰사 업무의 일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66년(고종 3) 7월 평안도 지역의 과거시험에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초시 실시 예정일이 칙사의 행차와 같았다. 감사는 칙사의 행차를 맞이해야 하므로, 대소과 초시의 주관을 위해 용강현령유초환(兪初煥)을 겸도사를 차출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변천

성종 연간 이후 겸도사가 다시 부각된 것은 중종 때이다. 1508년(중종 3) 경기감영에서 중앙으로 올리는 진상품의 봉헌을 위해 군직(軍職)에 있거나 무록관(無祿官)별제(別提)를 겸도사에 제수하자고 하였다. 이 밖에도 함경도 지역의 구황 전담을 위해 겸도사를 파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설치 여부는 알 수 없다. 이후 고종 연간에도 겸도사가 한때 설치된 적이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