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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대표표제=흠경각|한글표제=흠경각|한자표제=欽敬閣|대역어=|상위어=경복궁(景福宮)|하위어=|동의어=|관련어=교태전(交泰殿), 옥루기륜(玉漏機輪), 함원전(含元殿)|분야=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유형=건축|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조재모|일시=|장소=경복궁, 창덕궁|규모=정면 6칸/측면 4칸/총 24칸|양식=익공, 겹처마, 팔작지붕|관련인물=|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788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8001_002 『광해군일기』 5년 8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1007_003 『세종실록』 20년 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09014_001 『명종실록』 8년 9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12024_002 『명종실록』 8년 12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02_002 『명종실록』 9년 8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8001_002 『광해군일기』 5년 8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611017_001 『효종실록』 6년 11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311004_001 『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504025_002 『고종실록』 25년 4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11015_001 『성종실록』 10년 11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9106_004 『성종실록』 21년 윤9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05010_003 『성종실록』 24년 5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411008_001 『중종실록』 4년 11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508003_002 『명종실록』 5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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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도구|대표표제=흠경각|한글표제=흠경각|한자표제=欽敬閣|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관상(觀象), 누각(漏閣), 빈풍도(瀚風圖), 수시(授時), 옥루(玉漏), 흠경각(欽敬閣漏)|분야=문화/과학/천문|유형=물품·도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전기|왕대=조선전기|집필자=정성희|용도=|재질=|관련의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737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경복궁 교태전 서쪽에 있는 전각으로 조선전기에 옥루기륜을 설치했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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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때에 만들어진 천문시계의 일종인 흠경각루를 보관하던 누각.
  
 
=='''개설'''==
 
=='''개설'''==
  
흠경각(欽敬閣)은 천문기기인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한 건물로 천문의 운행을 이해하여 통치하는 왕의 전각이라 할 수 있다. ‘흠경(欽敬)’이라는 이름은 『서경(書經)』「요전(堯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節候)를 알려 준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서쪽에 함원전(含元殿)와 남북으로 배치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4칸의 익공 팔작지붕 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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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경각(欽敬閣)은 흠경각루 즉, 옥루를 보관하는 누각으로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다. 그 규모와 제도는 세종이 지시한 것으로,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흠경이라는 이름은 『서경(書經)』「요전(堯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에서 따온 것으로 관상(觀象)과 수시(授時)를 실천하는 집을 의미한다. 흠경각은 국왕이 백성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천도(天道)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 정치를 베푸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위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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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특징'''==
  
흠경각은 현재 경복궁 교태전의 서쪽에 있었다. 처음 세종대에 창건될 때는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있었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경복궁 침전 옆에 있었다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에는 천추전 서쪽에 묘사되었다. 경복궁에 있었던 흠경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대신 1614년(광해군 6)에 창덕궁에 흠경각이 영건되었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8001_002 『광해군일기』 5년 8월 1일]), 후에 철훼되어 만수전(萬壽殿)의 터가 되었다. 흠경각은 정교한 시계 장치인 옥루기륜을 두어 천문의 흐름을 알게 하였던 전각으로 왕의 통치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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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천문대를 경복궁 후원인 경회루에다 설치하여, 수시로 점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천추전 서쪽 뜰에다 한 칸 집을 세운 것이 흠경각루이다. 세종은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천상의 시간을 지상의 시간으로 하사받아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천도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 정치를 베푸는 귀감으로 삼았다.
  
=='''변천 및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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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경각 안에 설치되어 있는 천상의 물시계인 흠경각루 즉, 옥루에는 종이로 만든 산이 있었는데 이 산 사방에는 『시경』에 나오는 빈풍도(瀚風圖)에 따라 춘하추동의 풍경과 계절에 따라 농사짓는 풍경이 갖추어져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세종은 이를 바라보며 국가 통치에서 백성과 농업이 가장 중요함을 되새기고자 했다.
  
흠경각은 1437년(세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당시 세종은 옥루기륜,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만들어 흠경각 일원에 설치하였다. 경회루(慶會樓) 남쪽에 3칸으로 만들었던 보루각(報漏閣), 궁성 서북쪽의 간의대(簡儀臺) 등이 이와 관련되었다. 옥루기륜은 흠경각에 두었는데, 처음의 위치는 천추전의 서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이듬해 1월에 완공되었는데, 대호군(大護軍) 장영실(蔣英實)의 공이 컸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1007_003 『세종실록』 20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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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서운관 관리들도 있는데 굳이 침소 가까이에 흠경각을 설치한 것은 평소에도 궁궐 밖으로 자주 행차하여 백성들이 사는 모습과 농사일을 직접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궁궐 밖 행차는 대단히 번거롭고,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이 동행하여 민폐가 컸다. 세종은 궁궐 안에서도 밖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그것이 장영실이 만든 흠경각루이다. 인위적인 기계 작동이기는 하나,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동 무대 장치인 흠경각루를 보면서 세종은 궁궐 밖의 백성들의 삶과 농사일을 상상했다.
  
우승지(右承旨)김돈(金墩)이 기문을 지었다. 기문에 따르면, 흠경각은 천추전 서쪽에 있는 1칸의 작은 전각으로 종이를 발라 만든 7척 규모의 산을 가운데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 옥루기륜을 설치하여 물의 힘으로 스스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었다. 금으로 탄환만한 크기의 해를 만들어 하루에 1바퀴 돌게 하였는데,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가운데로 진다. 정교한 장치로 시간에 맞추어 옥녀가 금방울을 울렸으며, 청룡·주작·백호·신무가 시간에 맞추어 이동하였다. 사각마다 종이나 북 등을 치게 되어 있었고, 쥐·소 등 12간지의 동물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장치는 원나라를 경유하여 들어왔던 아라비아 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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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1553년(명종 8)에 경복궁 대내에 화재가 있었는데, 강녕전·사정전(思政殿)과 함께 흠경각도 소실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09014_001 『명종실록』 8년 9월 14일]). 긴급히 흠경각의 초양(初樣)을 만들었고, 이듬해에 중창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12024_002 『명종실록』 8년 12월 24일])([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02_002 『명종실록』 9년 8월 2일]).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이 소실될 흠경각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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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경각루와 그것을 보관하는 집인 흠경각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이후 영조 때 흠경각을 지었는데, 이 흠경각은 옥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보관하기 위하여 창경궁에 지은 것이다. 지금 경복궁에 복원된 흠경각은 대원군 지은 것이다. 이것은 옥루나 ‘천상열차분야지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광해군대에 들어 창덕궁홍문관(弘文館) 북쪽 깊숙한 곳에 흠경각을 설치하였는데, 다른 건축 공사가 많아 기간이 길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8001_002 『광해군일기』 5년 8월 1일]). 효종대에는 창덕궁 흠경각 자리에 만수전을 세웠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0611017_001 『효종실록』 6년 11월 17일]). 이후 경복궁이 중건된 고종대에 들어 흠경각을 중건하였다.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1876년(고종 13)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za_11311004_001 『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1888년(고종 25)에 복구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504025_002 『고종실록』 25년 4월 25일]). 1888년의 중건에서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으로는 홍우길(洪祐吉), 서사관으로는 김익용(金益容), 현판서사관(懸板書寫官)으로는 송병서(宋秉瑞)를 제수하였다. 이후 1917년의 창덕궁 화재를 복구할 경복궁의 전각 재목을 활용하면서 1920년에 철거되었다가 1995년에 복원되었다.
 
 
 
=='''형태'''==
 
 
 
현재의 흠경각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24칸 규모이며, 사각형 기둥에 익공을 올린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중앙부 정면 2칸에 대청을 두고 양옆에 측면 퇴를 포함하여 온돌방을 설치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온돌방의 후면 퇴도 온돌을 두었다. 전면에는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북쪽의 함원전과 형태가 거의 같으며, 함원전과 함께 교태전 서편의 일곽을 이루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성종대에는 흠경각 등의 천문기기에 조금씩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11015_001 『성종실록』 10년 11월 15일])([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9106_004 『성종실록』 21년 윤9월 6일]). 이에 흠경각을 보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05010_003 『성종실록』 24년 5월 10일]). 중종대에도 내관,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 등으로 하여금 개수하게 하여 세종대의 제도를 계승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411008_001 『중종실록』 4년 11월 8일]). 명종대에도 흠경각의 천문기기가 워낙 정교한 것이므로 파손에 대비하기를 청하여 기기를 다시 만들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508003_002 『명종실록』 5년 8월 3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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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도(景福宮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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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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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운관지(書雲觀志)』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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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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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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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세종대의 천문학 발달」,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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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운, 「이씨조선의 시계제작 소고」, 『향토 서울』, 1971.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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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30 판



조선 세종 때에 만들어진 천문시계의 일종인 흠경각루를 보관하던 누각.

개설

흠경각(欽敬閣)은 흠경각루 즉, 옥루를 보관하는 누각으로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다. 그 규모와 제도는 세종이 지시한 것으로,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흠경이라는 이름은 『서경(書經)』「요전(堯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에서 따온 것으로 관상(觀象)과 수시(授時)를 실천하는 집을 의미한다. 흠경각은 국왕이 백성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천도(天道)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 정치를 베푸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세종은 천문대를 경복궁 후원인 경회루에다 설치하여, 수시로 점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천추전 서쪽 뜰에다 한 칸 집을 세운 것이 흠경각루이다. 세종은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천상의 시간을 지상의 시간으로 하사받아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천도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 정치를 베푸는 귀감으로 삼았다.

흠경각 안에 설치되어 있는 천상의 물시계인 흠경각루 즉, 옥루에는 종이로 만든 산이 있었는데 이 산 사방에는 『시경』에 나오는 빈풍도(瀚風圖)에 따라 춘하추동의 풍경과 계절에 따라 농사짓는 풍경이 갖추어져 있었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세종은 이를 바라보며 국가 통치에서 백성과 농업이 가장 중요함을 되새기고자 했다.

세종이 서운관 관리들도 있는데 굳이 침소 가까이에 흠경각을 설치한 것은 평소에도 궁궐 밖으로 자주 행차하여 백성들이 사는 모습과 농사일을 직접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궁궐 밖 행차는 대단히 번거롭고,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이 동행하여 민폐가 컸다. 세종은 궁궐 안에서도 밖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그것이 장영실이 만든 흠경각루이다. 인위적인 기계 작동이기는 하나,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동 무대 장치인 흠경각루를 보면서 세종은 궁궐 밖의 백성들의 삶과 농사일을 상상했다.

변천

흠경각루와 그것을 보관하는 집인 흠경각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이후 영조 때 흠경각을 지었는데, 이 흠경각은 옥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보관하기 위하여 창경궁에 지은 것이다. 지금 경복궁에 복원된 흠경각은 대원군 때 지은 것이다. 이것은 옥루나 ‘천상열차분야지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박성래, 「세종대의 천문학 발달」,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전상운, 「이씨조선의 시계제작 소고」, 『향토 서울』, 197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