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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9 기준 최신판



자기(磁器)로 만들어진 묘지(墓誌).

개설

자지(磁誌)는 자기로 만든 묘지이다. 묘지는 무덤 주인에 대한 내용을 적어 무덤 안이나 주변에 묻는 기록물이다. 무덤의 묘비가 없다면 자손이나 주변 사람들이 누구의 무덤인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되므로 묘지를 넣어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무덤의 벽에 묘지의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돌을 묘지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로 묘지를 만들었으며, 형태는 주로 사각의 판형이었다.

연원 및 변천

묘지는 무덤 주인의 이름, 생몰년, 가계와 행적을 쓰거나 새겨 무덤에 넣어주는 물건이다. 묘지를 묻는 이유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무덤의 주인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으로 무덤 앞에 묘표를 세워 누구의 무덤인지를 나타내지만 천재지변이나 전란 등으로 지상의 표식이 사라지면 무덤 주인을 구분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 때문에 묘지를 지하에 묻어 대비하는 동시에 무덤 주인의 행적까지 기록하여 죽은 자를 기렸다. 그러므로 묘지는 돌처럼 땅속에서도 오래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재질로 제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자기로 묘지를 만들었다. 자기로 묘지를 만들면 돌처럼 땅속에서 오래 견딜 수 있었으며 딱딱한 돌에 글을 새기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는 자기 묘지가 일반 사대부는 물론 왕족들의 무덤에도 사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분청자로 제작된 묘지와 함께 백자 묘지를 사용하였는데, 백자에 내용을 흑상감하거나 음각하였다. 청화 안료가 조선의 백자 제작에 도입되고 난 이후에는 청화백자로 제작된 묘지도 증가하였다.

조선시대 왕릉에는 자기로 만든 묘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왕실의 검소함을 몸소 실천했던 영조는 자기로 만든 묘지의 간편함을 강조하며 자신을 포함하여 그 이후로는 왕릉에도 자기로 만든 묘지를 활용하도록 했다(『영조실록』 30년 8월 3일). 영조는 자기로 만든 묘지를 사용하는 것이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므로 혹여 당시의 예법을 들어 왕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경계하기 위해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寧陵)의 지석이 자기로 만들어졌음을 알렸다. 또한 자기로 지석을 만든 것은 장례 의식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려는 선왕의 의도가 반영된 것임을 강조하였다(『영조실록』 30년 8월 5일). 영조는 이러한 자신의 의지를 『상례보편(喪禮補編)』에 담아 왕릉에 자기로 만든 지석을 항식으로 삼아 활용하도록 하였다.

사관은 자기로 만든 묘지를 쓰고 봉분의 사방석(四方石)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여 왕릉 축조로 인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준 영조에 대하여, 왕이 백성을 애휼(愛恤)하는 것으로 칭송하였다(『영조실록』 33년 5월 5일). 그러나 영조가 죽고 난 다음에 왕릉에 사용되는 묘지 가운데 청자로 구워 만든 것은 오히려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오석(烏石)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순조실록』 5년 2월 13일). 검소함을 추앙했던 영조가 자기로 만든 지석의 사용을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종 이후의 왕들은 오석으로 지석을 만들었다(『철종실록』 8년 8월 19일), (『고종실록』 34년 4월 10일).

형태

삼국시대에는 묘지의 내용을 무덤의 벽에 기록하거나 따로 석판(石板)을 만들어 묘지로 사용했으며, 고려시대 이후에 제작된 묘지는 대부분 돌을 사각형으로 깎고 그 위에 내용을 음각했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묘지가 등장했다. 조선초기에는 분청자와 백자로 묘지가 제작되었으며, 형태는 대부분 판형이지만 일부 원형이나 사각의 통형 묘지도 있다. 조선전기 이후에 제작된 대부분의 자기 묘지는 직사각형인 판자이다. 간혹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반상기로 사용되었던 발, 접시 등에 내용을 적어 만든 묘지도 만들어졌다.

참고문헌

  • 국립중앙박물관, 『삶과 죽음의 이야기, 조선 묘지명』,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