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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8 기준 최신판



백자토와 백자유로 제작된 자기질의 완.

개설

조선시대의 백자완(白磁椀)은 대접보다는 작은 크기의 그릇이다. 용도는 찻잔이나 사발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백자완은 가장 대중적인 식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분청사기·백자·청화백자·도기로 생산되었고, 특히 초기에는 분청사기로 대량 생산되었다. 조선전기에 중국 사신들이 왕실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종친과 관료는 물론 일반 사대부가에서도 최상품의 백자완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백자완은 조선전기부터 식생활 문화와 관련하여 꾸준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에서 사용한 백자완은 조선전기 분원에서 생산된 최상품이었다. 백자완의 기록은 세종대에 보이는데, “일본국 축전주태수(筑前州太守) 등원만정(藤源滿貞)과 그 막하(幕下)인 비주자사(備州刺史) 지상대장씨종(砥上大臧氏種)과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 등이 사람을 시켜 유황(硫黃) 2천 5백 근, 단목(丹木) 4천 5백 근, 청자분(靑磁盆) 70개, 백자완(白磁椀) 크고 작은 것 20개, 양향(良香) 13근, 진피(陳皮) 16근 등 매우 귀하고 값진 다양한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세종실록』 5년 9월 24일). 이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서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 왕실에 백자완이나 청자분 등의 도자기들을 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진상한 백자, 청자는 시기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중국산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다른 기록은 성종대에 보이는데, “종묘서(宗廟署) 제조(提調)이염의(李念義)가 묘중(廟中) 기물의 행방을 탐문해볼 것을 건의하니, 왕의 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이승언(李承彦)이 강승통(姜承統)의 집에 이르러 탁(卓) 2좌, 변(籩) 1사, 백자완 50개를 수득(搜得)하여,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鞫問)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성종실록』 21년 9월 25일). 관련 내용은 고(故) 강승통의 사당(祠堂)에서 백자완 수십 개 등을 찾아내어 국문한다는 것으로, 백자완이 당시에 재산 가치가 있는 소장품과 부장품으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백자완은 조선시대에 외국 사신의 진상품이나 벼슬아치들의 소장용으로 애용되었다.

형태

백자완은 구연부가 살짝 외반(外反)된 그릇으로 일반적인 대접보다 크기가 조금 작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 그 형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참고문헌

  • 강경숙, 『한국 도자사의 연구』, 시공사, 2000.
  • 김영원,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학연문화사, 1995.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