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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1616년(광해군 2) 동방오현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 작성한 의식 절차에 필요한 주요 항목.

개설

조선중기에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지칭되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배향 문제가 선조 이후의 오랜 논의 끝에 1616년(광해군 2) 7월 16일에 결정되고, 7월 26일에 예조의 건의로 종사절목을 마련하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이때 작성한 절목의 원문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종사절목은 동방오현의 문묘배향을 예를 갖추어 시행하기 위해 자세한 절목을 만든 것이다.

내용

1616년 당시에 마련한 절목의 원문은 전하지 않으나, 그 대략의 내용은 실록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당사자의 가묘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하고 배향 사실을 고유(告諭)하며, 위판은 서울에서 제작하여 대성전의 양무(兩廡)에 봉안하되 그 이전에 문묘에 고유하는 제사를 시행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림은 문묘의 가을 석채(釋菜) 이전에 위판을 봉안하여 함께 제사하고자 하였으나, 기일이 촉박하여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은 석채 이후에 별도로 봉안 제사를 행하도록 헌의하여 시행되었다.

변천

이후 1682년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배향이나 1688년의 김장생(金長生) 배향, 영조 때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배향, 고종 때의 김인후(金麟厚)·조헌(趙憲)·김집(金集)의 문묘배향 때의 절목도 전하지 않으나, 대체로 오현 종사 때의 절차가 준행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김상오, 「당쟁사의 입장에서 본 이이의 문묘종사 문제」, 『전북사학』4, 전북대학교 사학회, 1980.
  • 김영두, 「중종대 문묘종사 논의와 조선도통의 형성」, 『사학연구』85, 한국사학회, 2007.
  • 김용곤, 「16세기 사림의 문묘종사운동」, 『김철준박사 화갑기념 논총』, 1983.
  • 김해영, 「조선 초기 문묘 향사제에 대하여」, 『조선시대사학보』15, 조선시대사학회, 2000.
  • 배성, 「영조대 박세채 문묘종향론의 정치사적 성격」, 『조선시대의정치와 제도』, 집문당, 2003.
  • 이희권, 「동방오현의 문묘종사 소고」, 『전북사학』7, 전북대학교 사학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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