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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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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증광무과초시 |
한글표제 | 증광무과초시 |
한자표제 | 增廣武科初試 |
상위어 | 과거(科擧), 무과(武科) |
관련어 | 증광시(增廣試),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추(騎芻), 관혁(貫革), 기창(騎槍), 조총(鳥銃), 유엽전(柳葉箭), 격구(擊毬), 편추(鞭芻), 강서(講書)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법제·정책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노영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증광무과초시(增廣武科初試)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11년 4월 20일, 『광해군일기』 10년 4월 8일, 『광해군일기』 3년 12월 12일, 『현종실록』 2년 8월 19일, 『광해군일기』 10년 8월 5일 |
조선시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무과 시험인 증광무과의 첫 단계 시험.
개설
조선시대에 왕의 즉위 등 큰 경사가 있을 경우 증광무과를 시행하였는데 시행 방법은 무과 식년시(式年試)와 동일하게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3단계로 이루어졌다. 증광무과초시는 선발 인원, 시험 방법 및 과목, 시험 장소 등도 식년무과의 초시와 동일하여 28명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여러 경사가 겹칠 경우에는 대증광시(大增廣試)라고 하여 선발 인원을 2배로 하였다. 대외적인 상황에 따라 초시 합격자를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왕이 즉위하거나 즉위한 지 30년 또는 40년, 혹은 원자(元子) 혹은 원손(元孫)의 탄생, 왕세자의 책봉과 입학, 또는 왕과 왕세자의 가례(嘉禮), 왕과 왕비의 평복(平復), 선왕의 부묘(祔廟), 왕이나 왕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등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 이를 기념하여 특별히 문무과의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경과(慶科)라 하였다. 경과 중 왕의 즉위 등 특별한 경사가 있을 경우 증광시(增廣試)를 실시하였는데, 여러 경사가 겹칠 경우에는 대증광시라고 하여 선발 인원을 2배로 선발하였다. 이외에 1633년(인조 11) 4월에 인조의 부친인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는 것을 기념하여 증광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1년 4월 20일). 대외적인 위기가 나타나 널리 무사를 선발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증광무과를 통하여 다수의 무사를 뽑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618년(광해군 10) 북방 후금(後金)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증광무과초시 입격자 300여 명을 모두 급제시켜 방수하는 군대를 증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조정 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8일).
내용
증광무과도 전체적인 절차 및 선발 인원 등은 정규 무과인 식년무과와 동일하였다. 예를 들어 1611년(광해군 3)의 증광무과초시인 향시(鄕試)와 한성시(漢城試) 등의 정원을 식년시의 사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12월 12일). 구체적으로 초시는 훈련원에서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한 후 녹명(錄名)하고 시행하는 원시(院試)와, 지방에서 각 도병마절도사가 차사원을 정하여 자격을 심사한 후 녹명하는 향시로 나뉘었다. 합격 인원은 원시는 70명이고, 향시는 경상도 30명, 충청도·전라도 각 25명, 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각 10명 등 초시에서는 모두 190명을 선발하였다. 대증광시의 경우에는 식년무과 정원의 2배인 380명을 뽑았다(『현종실록』 2년 8월 19일).
초시는 각각 두 곳의 시험장에서 치렀는데, 각 시험장인 소(所)마다 시관(試官)으로 2품 이상의 1명과 당하관인 문관 1명 및 무관 2명 등 4명을 선발하였다. 시험을 감독하는 감시관(監試官)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인 1명씩을 두었다. 향시의 경우에는 해당 도내의 영장(營將)이나 우후(虞候) 및 관계가 높은 수령 중에서 선택하여 정하였다. 시험 과목은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추(騎芻)·관혁(貫革)· 기창(騎槍)·조총(鳥銃)·유엽전(柳葉箭)·격구(擊毬)·편추(鞭芻)·강서(講書) 모두 11가지 과목으로 왕의 낙점을 받아 1·2과목을 정하였다. 먼저 무예를 시험한 이후 강서하는 시험을 보았다.
한성에서는 종루를 좌우로 하여 왼쪽은 1소에 붙이고, 오른쪽은 2소에 붙이도록 하였다. 1소는 훈련원에서, 2소는 모화관(慕華館)에서 시행하였다. 지방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좌도(左道)는 1소에 붙이고, 우도(右道)는 2소에 붙였다. 또 함경도와 황해도는 1소에 붙이고, 평안도와 강원도는 2소에 붙였다.
변천
증광무과는 전체적인 절차는 식년무과에 따랐으므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대외적인 위기가 고조되던 광해군대에는 널리 무사를 취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하여 증광무과초시에 입격한 사람을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여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8월 5일).
18세기 전반에 편찬한 『속대전(續大典)』 에서는 관혁(貫革) 등 일부 무예 과목을 초시에 추가하였고, 시관은 병조에서 추천하여 선발하도록 규정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무과총요(武科總要)』
- 나영일, 『『무과총요』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급제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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