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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선당 인근에 있는 문으로 동궁전의 외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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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동궁 영역의 정문.
  
 
=='''개설'''==
 
=='''개설'''==
  
이극문(貳極門)은 경복궁 비현각(丕顯閣)의 동쪽 행각이 남쪽으로 뻗어 마무리되는 지점에 놓인 2칸의 문으로 동향하였다. 이극(貳極)이라는 말은 동궁과 연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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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문(貳極門)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점에 있던 동궁(東宮) 영역의 정문이다. 동궁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거처하며 정치 수업을 받던 곳이다. 이극문은 이들이 동궁을 나설 때 사용하던 문이다. 동궁의 중심 건물은 성종대 이후에 건립된 저승전(儲承殿)이었는데, 1764년(영조 40)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이극문도 함께 화재로 사라졌다가 1782년(정조 6)에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할 때 함께 중건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4012018_001 『영조실록』 40년 12월 18일])([http://sillok.history.go.kr/id/kva_10808002_004 『정조실록』 8년 8월 2일]). 이후 이극문은 중희당을 나와 출궁(出宮)할 때 이용하는 문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고종 연간에 중건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외행각(外行閣)의 남쪽 문도 이극문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11008_001 『고종실록』 4년 11월 8일]).
  
 
=='''위치 및 용도'''==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바깥 행랑의 남문이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자선당 안의 행랑 남문을 중광문(重光門), 북문을 육덕문(毓德門), 바깥 행랑의 남문을 이극문으로 명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11008_001 『고종실록』 4년 11월 8일]). 『궁궐지』에 구현문(求賢門) 남쪽 문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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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이극문은 창경궁 동궁 영역에 있던 문이다. 현재의 위치로 보면, 대략 낙선재(樂善齋) 앞 공터 즈음으로 여겨진다.
  
 
=='''형태'''==
 
=='''형태'''==
  
2칸 문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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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東闕圖)」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극문은 높이가 다른 2칸 문이다. 북쪽 칸을 낮게, 남쪽 칸을 높게 구성하였다. 동궁 정문으로서의 격을 보이기 위하여 용마루 양쪽 끝에 용두를 설치하였으며, 2칸 모두에 문짝을 설치했다. 궁장과 맞닿은 측벽은 궁장 높이까지 벽돌을 쌓아 만든 화방벽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관련사건 및 일화'''==
  
창경궁에도 이극문이 있는데, 낙선재(樂善齋) 일대의 남서쪽으로 난 문이다. 「동궐도(東闕圖)」에 1칸의 솟을문과 따로 1칸의 협문이 연이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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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문 안쪽에는 오래된 우물 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자경전(慈慶殿)을 짓고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1785년(정조 9)에 이르러 가산을 철거하고 우물을 판 다음 근처에 작은 건물을 세워 내려다볼 수 있게 하였다. 본래 이 자리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 거처하던 수강궁(壽康宮)의 옛터로 기재되어 있어서, 이 작은 건물을 수강재(壽康齋)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908027_005 『정조실록』 9년 8월 27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북궐도형(北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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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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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日省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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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지(宮闕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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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일력(內閣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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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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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9 판



창경궁 동궁 영역의 정문.

개설

이극문(貳極門)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점에 있던 동궁(東宮) 영역의 정문이다. 동궁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거처하며 정치 수업을 받던 곳이다. 이극문은 이들이 동궁을 나설 때 사용하던 문이다. 동궁의 중심 건물은 성종대 이후에 건립된 저승전(儲承殿)이었는데, 1764년(영조 40)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이극문도 함께 화재로 사라졌다가 1782년(정조 6)에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할 때 함께 중건되었다(『영조실록』 40년 12월 18일)(『정조실록』 8년 8월 2일). 이후 이극문은 중희당을 나와 출궁(出宮)할 때 이용하는 문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고종 연간에 중건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외행각(外行閣)의 남쪽 문도 이극문이다(『고종실록』 4년 11월 8일).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이극문은 창경궁 동궁 영역에 있던 문이다. 현재의 위치로 보면, 대략 낙선재(樂善齋) 앞 공터 즈음으로 여겨진다.

형태

「동궐도(東闕圖)」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극문은 높이가 다른 2칸 문이다. 북쪽 칸을 낮게, 남쪽 칸을 높게 구성하였다. 동궁 정문으로서의 격을 보이기 위하여 용마루 양쪽 끝에 용두를 설치하였으며, 2칸 모두에 문짝을 설치했다. 궁장과 맞닿은 측벽은 궁장 높이까지 벽돌을 쌓아 만든 화방벽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이극문 안쪽에는 오래된 우물 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자경전(慈慶殿)을 짓고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1785년(정조 9)에 이르러 가산을 철거하고 우물을 판 다음 근처에 작은 건물을 세워 내려다볼 수 있게 하였다. 본래 이 자리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 거처하던 수강궁(壽康宮)의 옛터로 기재되어 있어서, 이 작은 건물을 수강재(壽康齋)라고 하였다(『정조실록』 9년 8월 2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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