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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8 기준 최신판



경복궁 동궁에 있는 전각.

개설

비현합(丕顯閤)은 경복궁 동궁전인 자선당(資善堂) 동쪽에 있는 전각이다. 원래 왕의 연거지소(嚥居之所)로 만들었다가 고종대에 동궁전으로 삼았다. 목조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자선당과 함께 동서로 동궁권역을 이룬다. 비현각(丕顯閣)이라고도 부른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동궁은 근정전의 동쪽에 별도로 구획되었다. 원래는 궁궐 밖에 있던 동궁을 세종대에 궐내로 옮겼다. 동궁권역 내 서쪽에 자선당, 동쪽에 비현합이 있다. 두 전각은 모두 일(日)자형으로 2중의 마당을 조성하고 북쪽 마당에 각각 주전각이 있다. 앞쪽으로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 동궁에 속한 시설이 배치되었다. 그 앞으로는 계조당(繼照堂)이 있다. 이들이 함께 동궁을 이룬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동궁의 편당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비현합은 애초에 동궁전의 일부가 아니라 왕의 연거지소로 삼은 것이었다. 주로 경연에 관계된 기사가 많으며 야대(夜對)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비현합에서의 야대 시에는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고 편복(便服)으로도 임하였다(『중종실록』 1년 9월 21일). 개념적으로 창덕궁의 수문당(修文堂) 즉 희정당(熙政堂)과 유사하게 인식되었다(『중종실록』 25년 11월 23일). 비현합에서는 진풍정(進豊呈) 의식을 거행하였고 재계(齋戒)나 나희(儺戲) 관람, 국문(鞫問), 주연, 강(講), 인견(引見), 야대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선조는 더위로 정전(正殿)을 피해 이곳에 임어하였다(『숙종실록』 38년 6월 23일). 이로 보아, 조선전기에 존재했던 비현합은 왕의 공간이었음이 확인된다. 동궁 전각으로 변모한 것은 고종 대에 중건할 때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변천 및 현황

비현합은 1463년(세조 9)에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 만들어졌다(『세조실록』 9년 11월 8일). 사정전(思政殿) 동쪽 모퉁이의 내상고(內廂庫) 2칸에 창을 내고 연거지소로 삼은 것이다. 그 이름은 『서경(書經)』의 “새벽에 크게 덕(德)을 밝히시어” 라는 매상비현(昧爽丕顯) 구절에서 따왔다. 처음에는 비현합으로 주로 칭하였으나 중종대를 거치면서 점차 비현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동궁의 전각으로 성격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동궁 일곽은 크게 훼손되었다. 자선당은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불탔다. 비현각과 수정전(修政殿) 일곽의 건물은 일본의 요정으로 팔려 나갔다. 경성부 서사헌정(西四軒町)에 있었던 남산장은 비현각을 옮겨 지은 것이다. 비현각을 비롯한 동궁권역의 건물들은 1994~1999년의 공사로 복원되었다.

형태

비현합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정면 길이에 비해 측면 깊이가 크지 않은 전각이다. 중종은 야대하는 곳으로 비현합을 쓰기에 너무 협착하다 하여(『중종실록』 22년 7월 13일) 확장하고자 하였다가 그만두었으며, 명종대에도 유사한 논의가 있었다. 비현합의 협착함은 선조대에도 재차 지적되었다(『선조실록』 7년 1월 21일).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각 칸의 규모를 8자[尺]로 기록하였다.

현재의 비현각은 동쪽에 전후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방을 두었고, 서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을 두었으며, 나머지 중앙부에 대청을 설치하였다. 동쪽보다 서쪽의 방이 큰 비대칭형의 평면이다.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얹었고 양상도회는 하지 않았다. 대청부 3칸에만 전면 계단이 설치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세조는 비현합에서 강(講), 인견(引見)뿐만 아니라 진풍정(進豊呈), 재계(齋戒), 나희(儺戲) 관람, 주연(酒宴)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세조실록』 9년 11월 15일)[『세조실록』 12월 20일 1번째기사]. 성종대에 정희왕후(貞熹王后) 장례 때 협락하고 비루한 승화당(承華堂)을 대신하여 비현합을 여차로 삼았다(『성종실록』 14년 4월 11일). 인종대에는 국상의 재전(齋殿)으로 삼은 바 있는데, 빈소인 사정전에서 가까운 곳이라 하여 중전이 이곳을 쓰고자 하였다. 다만 이곳이 외처와 가까워 항상 거처하기가 어려우니 비현각을 상차(喪次)로 삼되 때때로 나아가는 것으로 하였다(『인종실록』 1년 5월 2일).

명종대에 경복궁 대내에 화재가 있었을 때 강녕전(康寧殿), 사정전, 흠경각(欽敬閣) 등이 소실되었다(『명종실록』 8년 9월 14일). 복구 방침을 논하면서 일찍이 중종대에 비현각을 확장하고자 하였던 일을 살폈는데, 왕은 비현각의 확장보다는 내부의 기둥 때문에 좁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후 강녕전과 비현각에 억계(抑戒)와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걸도록 하였다(『명종실록』 9년 11월 21일). 한편 비현각 앞뜰에서 술을 하사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17년 10월 26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 복원정비기본계획보고서』, 문화재청, 1994.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우동선 외,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효형출판, 200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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