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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효종대에 창경궁의 후방에 조성된, 왕자와 공주들의 처소가 모여 있는 영역의 정문.

개설

『궁궐지』에 따르면 효종은 요화당, 계월합, 난향각, 취요헌 등 소규모의 전각들을 하나의 건물 군으로 연결하여 영건하였다. 창경궁 후원에 일련의 공간을 조성하여 왕자의 독서처 겸 공주들이 거처하는 장소로 지은 것이다. 만보문(萬寶門)은 그 전각들의 영역을 아우르는 담장의 정문으로 들어섰을 것이라 판단된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 집복헌의 동북쪽에 있었다. 「동궐도」 상에는 통화전 서쪽에 작은 전각들로 일군의 영역을 이룬 장소가 있는데 이 공간의 정문이다.

변천 및 현황

1659년(효종 10)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1900년대 초까지 건재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훼손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형태

담장 사이에 설치된 솟을문이다. 구조적 형태로는 사주문에 주칠을 한 2짝 판장을 달았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궁궐지』의 기록에는 요화당, 계월합, 난향각, 취요헌 등의 전각은 효종이 자신의 공주 4명을 위한 처소로 따로 지었다고 설명하였다. 『효종실록』에는 이와 같은 자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강관들과 대면하여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지평이었던 김만기가 왕에게 고하는 내용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김만기는 후원에 알 수 없는 건축 역사가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이는 왕이 아랫사람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니 지금은 건축을 할 때가 아니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효종은 세자가 독서할 장소 몇 칸을, 그것도 경비를 쓰지 않으려고 해사에 알리지 않고 대내에서 조용히 짓고 있다고 답변하였다(『효종실록』 10년 윤3월 10일).

송시열의 문집 『송서습유』에는 공주들의 거처를 짓는 것에 대한 효종의 속마음이 짧게 언급되었다. 자신이 대의를 가지고 북벌을 계획하려 해도 조정의 신하들이 도무지 무관심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한을 이루지 못하는 군주가 그저 딸들의 집이나 짓고 있다고 울분을 토로한 것이다. 네 공주의 건물들과 연결하여 지은 세자의 독서처인 신독재도 이때에 지어진 것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송서습유(宋書拾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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