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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경희궁에서 동궁의 정침에 해당하는 건물.

개설

승휘전(承輝殿)은 광해군에 의해 경덕궁이 지어질 당시 세자의 정침으로 건립되었다.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에 경덕궁을 영건하기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 12)에 마쳤다. 승휘전은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경덕궁이 완공되고 동궁의 첫 주인은 소현세자(昭顯世子)였다. 1655년(효종 6)에 승휘전을 헐어 창덕궁 수리공사의 자재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승휘전이 세자의 정침이라는 이유로 실행되지 않았다.

위치 및 용도

승휘전은 경덕궁, 즉 경희궁에서 동궁이 사용하는 정침이었다. 경희궁에서 세자의 생활공간은 승휘전이며, 양덕당(養德堂)은 내당이라 하여 서연을 하고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현재 승휘전은 소실되어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궁궐지(宮闕志)』에는 승휘전이 융복전(隆福殿)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1698년(숙종 24)에 중궁전 앞쪽에 있는 중궁전 소속 주방에서 화재가 일어나 승휘전으로 옮겨 붙어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아 융복전에 매우 근접할 정도로 가까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재로 소실된 이후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승휘전이 소실된 이후 동궁의 생활공간은 집희당(緝熙堂)과 경선당(慶善堂)으로 바뀌었다.

변천 및 현황

승휘전은 경희궁 건립 당시에 동궁의 정침으로 건립되었으나, 1698년 11월 23일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순조대에 경희궁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西闕圖案)」에는 빈터만 남아 있으며, 승휘전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93년(숙종 19) 3월에 승휘전을 수리하고 담장을 헐어 터를 넓히는 공사가 있었다. 이때 승휘전 북쪽 담장 아래에서 사람이 뼈가 발견되었다. 오랜 옛날에 사람이 매장되었던 곳에 궁궐을 지었던 것이다. 이에 숙종이 제문을 내리고 약간의 제물(祭物)을 내려 죽은 이를 위로해 주었다(『숙종실록』 19년 3월 23일). 이날의 일로 승휘전 수리를 멈출 것을 요청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리공사를 마무리하였다. 1693년에 승휘전 담장에 대한 수리공사 내역은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에 기록되었다. 승휘전 삼면에 판장(板障)을 설치하고 단청을 한 기록이 있으며, 이때 현판에 금을 입혀 내건 기록도 있다.

참고문헌

  •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 『궁궐지(宮闕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