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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함경남도 삼수군에 속한 보(堡).

개설

감파보는 함경남도 삼수군에 설치된 군사시설로, 1518년(중종 13)에 장진강(長津江) 밖에 농보(農堡)를 축조하고, 권관을 두어 지키게 했다. 1594년(선조 27)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함락된 이후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감파보는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의 감파리(甘坡里)에 설치된 보이다. 삼수군의 행정 구역으로는 어면사(魚面社)에 해당한다. 삼수군의 읍치로부터 남쪽 114리(약 44.8㎞), 장진강의 안쪽에 위치했다. 현재 북한 양강도 김정숙군 용하노동자구에 해당한다. 앞뒤로 장진강과 가응제봉에 의지하고 있었다. 앞쪽으로는 강을 사이에 두고 폐사군 지역의 고미동에 거주하는 여진 부락과 마주하고 있었다. 세조대에 사군을 폐한 이후에는 여진 지역과 가장 가까운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변천 및 현황

감파보의 설치는 사군의 철폐와 관련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단종~세조 연간에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자성(慈城) 등 백두산 서쪽, 압록강 상류의 4군에 대한 관원의 파견을 정지하였고, 이후 이 4군을 폐사군(廢四郡)이라고 일컬었다. 이로 인해 평안도의 강계, 함경남도의 삼수·갑산 일대는 백두산 인근의 여진족에 대한 최전선이 되었다. 조선이 4군을 철폐한 이후, 이 지역에는 점차 여진의 부락이 번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변지가 약탈당하거나 삼의 채취를 위해 월경하여 충돌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삼수군 일대가 여진족의 약탈을 당하는 경우가 잦아지자, 조선에서는 정토(征討) 논의가 제기되었고, 동시에 군사시설을 보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연산군대에 삼수군의 감파리에도 50여 기의 여진족이 남녀 총 네 명과 소 두 마리를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5월 9일). 순변사변종인(卞宗仁)은 여진족의 약탈로부터 어면창(魚面倉)을 보호하기 위해 토보(土堡)를 축조하고 만호를 두는 한편, 인근의 감파와 석모로(石毛老)에 농보(農堡)를 두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7월 13일)(『연산군일기』 5년 7월 24일). 이에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성준(成俊)과 부원수(副元帥)이계동(李季仝)은 종사관고형산(高荊山)을 보내어 어면·감파·석모로에 축성하도록 했으나, 지리적인 이유로 어면보를 제외한 두 보의 축조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8월 7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감파농보는 1518년에야 축조되었다. 감파보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예하의 군관을 권관으로 파견하여 관리하다가, 1528년(중종 23) 병조와 비변사의 건의로 병조에서 뽑아 보내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중종실록』23년 2월 2일).

감파보는 1594년(선조 27) 4월 고미동(古味洞) 일대에 거주하던 온하위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선조실록』27년 4월 4일). 조선 조정에서는 이 지역이 수차례 여진족의 침입에 노출되었던 점을 이유로 감파보를 포기하게 되고, 그 역할은 인근의 자작보(自作堡)로 넘어가게 된다.

형태

감파보는 돌로 지어진 석보로 둘레가 328척(약 99.4m), 높이는 7척(약 2m)이었다. 김성일(金誠一)의 『학봉일고』에 따르면 감파보는 남쪽으로는 가파른 고개에 의지해 있고, 북쪽으로는 강물을 접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한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감파보는 가로 73m, 세로 46m 정도인 장방형의 석보라고 하며, 기단부의 너비는 2.4m, 현재 남아 있는 서쪽 성벽의 높이는 1.8m라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94년(선조 27) 4월, 감파보는 정체불명의 여진족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일본과의 강화회담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조선 조정에서는 침략의 주체를 파악하지 못하였고, 인근의 가을파지보(加乙波知堡)에서 여진족과 호시(互市)를 열게 된다. 이듬해 조선 조정에서는 신충일(申忠一)을 건주여진(建州女眞)으로 파견하게 되는데, 이때 감파보를 공격하였던 주체가 고미개(古未介)의 추장 김왜두(金歪斗)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신충일의 파견은 건주여진의 피로인 송환에 따른 회답이었는데, 이때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송환한 조선인은 감파보에서 잡혀간 조선인이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학봉일고(鶴峯逸稿)』
  • 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2008.
  • 장정수, 「16세기 말~17세기 초 조선과 건주여진의 배후 교섭과 신충일의 역할」, 『한국인물사연구』25, 한국인물사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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