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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5 기준 최신판



기로소에 있는 어첩을 보관하는 전각.

개설

『궁궐지(宮闕志)』에는 영수각(靈壽閣)과 관련하여 “기로소(耆老所)는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는데, 1394년(태조 3)에 건립되었다. 태조의 나이가 60세를 넘어 기로소에 들어갔는데, 서쪽 누각 벽 위에 이름을 써서 남겼다. 1719년(숙종 45)에 영수각을 기로소에 건립하고 어첩(御帖)을 보관했는데, 이해 숙종의 나이가 60세를 넘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기로소에 따로 어첩을 보관하는 장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에 어첩을 보관할 건물을 새로 건립했는데 이 전각이 영수각이다. 영수각은 1719년(숙종 45)에 완성됐다(『숙종실록』 45년 6월 9일).

이후 영조가 나이 50세에 기로소에 들어갔고, 1902년(광무 6)에 고종이 기로소에 들어갔다. 1902년에는 기로소 인근에 ‘대한제국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를 세우고 기념비전을 건립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내용

기로소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기로소의 시작은 1394년(태조 3)부터인데 이때 태조의 나이가 60세가 되어 직접 기로소에 들어갔다. 태조는 기로소 서루(西樓)의 벽에다가 직접 어휘(御諱)를 써서 남겼는데, 임진왜란으로 기로소가 없어지면서 같이 사라졌다.

태조가 기로소에 들어간 이후 1719년(숙종 45)까지 약 300여 년간 기로소에 들어간 왕이 없었다. 숙종은 기로소에 들어가기 위해 선대인 태조께서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흔적을 다시 복원해야만 했다. 임진왜란으로 사라진 서루를 다시 복원한다 하더라도 태조의 어휘를 복원하기는 불가능했다. 여러 논의 끝에 『기로소어첩(耆老所御帖)』을 만들어 어휘를 대신하기로 했다. 이때 만든 『기로소어첩』의 첫 장에는 태조의 휘호를 쓰고, 두 번째 장에는 숙종의 휘호를 썼다(『숙종실록』 45년 2월 10일).

어첩이 만들어진 후 어첩 봉안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49년(철종 즉위)에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기사지(耆社志)』에는 “1719년 2월 2일에 영의정(領議政)김창집(金昌集)이 어첩을 서루의 구감(舊龕)에 봉안해야 하지만 감실의 벽이 허물어져 없으니, 누각을 종부시(宗簿寺)의 선원각(璿源閣)처럼 지어서 봉안하자는 계(啓)에 따라 같은 해 3월 18일에 건립하기 시작해서 3월 25일에 상량했다. 홍문관(弘文館)에서 각호(閣號)로 영수각, 만년각(萬年閣), 승휴각(承休閣)의 삼망(三望)을 입계했는데 이 중에서 영수각이 선정됐다. 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에게 편액을 쓰게 했고,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이관명(李觀命)에게 상량문을 찬하게 했다. 그 결과 6월 9일에 영수각이 만들어졌고, 어첩은 6월 24일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었다. 『기사지』「관우(館宇)조」에 따르면, 영수각은 “기영관(耆英館)의 동쪽에 있는데 1719년에 새롭게 각(閣) 1칸을 남향으로 만들어 가운데 벽에 채감(彩龕)을 두고 어첩을 봉안했다. 전면에는 분합을 설치했고 사면으로 반 칸의 전퇴를 두었다. 기단 아래에는 네 모퉁이에 드므를 놓고 높은 담장으로 이를 둘러쌌다. 남쪽에는 삼문 3칸을 두었다.”고 했다.

1744년(영조 20)에는 영조가 나이 50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때 숙종 때 만든 어첩을 꺼내어 다음 장에 자신의 존호(尊號)와 왕(王) 자를 썼다(『영조실록』 20년 8월 26일). 1902년에는 고종이 기로소에 들어갔다. 고종은 영조의 예에 따라 기로소에서 어첩을 꺼내 자신의 존호와 황제(皇帝)라는 글자를 썼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이기 때문에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고종실록』 39년 4월 2일).

참고문헌

  • 『기사지(耆社志)』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2, 서울학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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