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문(朝宗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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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창덕궁 대보단의 동문.

개설

대보단(大報壇)은 황단(皇壇)이라고도 불린 제사 시설로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1704년(숙종 30)에 예조(禮曹) 판서(判書)민진후(閔鎭厚)가 발의해서 건립한 단으로 임진왜란 당시 군병을 보내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神宗)을 향사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곳에는 별대영(別隊營)의 고사(庫舍)가 있었는데 예조(禮曹)와 공조(工曹)를 시켜 이것을 철거하고 단유(壇壝)를 건립했다. 북쪽에는 단을 쌓았고 남쪽으로 중문과 남문을 두었으며 동문으로 조종문(朝宗門)을 설치했다. 동양에서 제후가 천자를 만나 알현할 때 봄에 만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만나는 것을 종(宗)이라 한다. 따라서 조종이라는 명칭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내용

조종문은 비록 대보단의 동문에 해당하지만 주변 지형의 영향으로 대보단의 정문 역할을 담당했다. 왕이 대보단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항상 명례문(明禮門)을 거쳐 조종문을 통해 대보단으로 진입했다. 1705년(숙종 31)에 숙종이 대보단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창덕궁 의춘문(宜春門)을 거쳐 금원(禁苑) 북쪽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조종문으로 대보단에 이르렀다(『숙종실록』 31년 3월 9일).

「동궐도(東闕圖)」와 『황단의(皇壇儀)』 도설에서 조종문은 2칸으로 묘사되었다. 북쪽의 1칸은 솟을대문 형식이고, 남쪽의 1칸은 북쪽보다 높이가 낮은 협문(夾門) 형식이다. 북쪽 솟을대문은 향로(香路), 남쪽의 협문은 어로(御路)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제례에 참석하는 신하들은 대보단 남쪽의 공북문(拱北門)을 통해 대보단에 출입했다.

조종문을 통과해 대보단 내부로 들어서면 곧바로 금천이 흐르고 금천에는 작은 석교가 놓여 있다. 이 석교는 사자교(獅子橋)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영조실록』 14년 3월 3일). 『궁궐지(宮闕志)』「만세송은(萬歲誦恩)」조에는 숙종이 지은 「사자교소기(獅子橋小記)」가 수록되어 있어 사자교가 만들어진 내력을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1704년 겨울에 천자를 제사 지내기 위해 후원의 서쪽에 단을 만들었다. 또 궁궐 담을 헐고 문을 세워 조종(朝宗)이라 했는데, 문안에 석교(石橋)를 만들어 연로(輦路)를 통하게 했다. 다리가 이루어진 뒤에 내가 직접 가보니 작은 바위 하나가 다리 왼쪽에 엎드려 있었는데, 흡사 사자(獅子)가 돌아보는 형상과 같았다. 아! 이 물건이 하필이면 다리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역시 다리가 이름을 얻을 계제였던 것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더구나 도성에 다리가 있으면 다 이름이 있는데 유독 이 다리만 이름이 없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이에 석공을 불러 그 형상에 준하여 다듬게 하고 다리를 사자교라 명명하였다. 황조(皇朝)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재을유(再乙酉) 3월 하한(下澣)에 배수(拜手) 경서(敬書)하다.”

참고문헌

  • 「동궐도(東闕圖)」『황단의(皇壇儀)』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 1, 서울학연구소, 1994.
      1. 그림1_00017965_「동궐도」, 창덕궁 대보단 조종문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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