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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3 기준 최신판



창경궁 명정전 서쪽 마당에 위치한 정자.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함인정(涵仁亭)은 명정전(明政殿) 서쪽에 위치하며 원래 인양전(仁陽殿) 터였고, 동쪽에는 빈양문(賓陽門)이 있다.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仁慶宮) 함인당(涵仁堂)을 헐고 여기에 옮겨 세우면서 그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가 뒤에 이 이름으로 고쳤다.”고 기록했다. 또 흠명전(欽明殿)이 함인정 근처에 있고 광해군 때 창건하여 계유년에 철거했다고 하나 상세하지 않다고 했다. 영조가 직접 지은 「함인정명병소서(涵仁亭銘幷小序)」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함인은 ‘해동(海東)의 만 가지[萬品]가 인의(仁義)에 흠뻑 젖는다.’는 의미이다.

내용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때 중건한 궁궐이다. 하지만 1624년(인조 2)에 발생한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通明殿), 양화전(洋畵展), 환경전(歡慶殿) 등 내전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됐다. 창경궁의 복구는 한참이 지나 1633년(인조 11)에 실시됐다. 당시 창경궁의 복구는 광해군 때 만들어진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철거해 옮겨 짓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구체적인 공사 내용은 『창경궁수리소의궤(昌慶宮修理所儀軌)』에 전한다.

함인정은 3소에서 진행했는데 “함인정은 1칸에 사면으로 각각 퇴를 덧달아 9칸인데, 5칸은 경수전(慶壽殿) 후행각 5칸을 옮겨 짓고, 나머지 4칸은 새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한편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고 옮겨 지은 건물 목록에 따르면, 인경궁의 함인당은 14칸이고, 경수전은 등장하지 않는 반면 경수당이 등장한다. 따라서 창경궁의 함인정은 인경궁의 경수당(慶壽堂)을 옮겨 짓고, 건물의 명칭은 함인당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경궁의 함인당 철거 및 이건(移建)은 1소에서 담당했는데, 이것으로 창경궁의 통명전 서책방 및 동행각 남쪽의 5칸을 만들었다.

창경궁은 왕이 일상적으로 상주하는 궁궐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왕대비 또는 빈 등이 거처하는 여성들의 공간 또는 왕·왕비·대왕대비의 빈전과 혼전, 세자·세자빈의 빈궁과 혼궁이 주로 차려진 궁궐이었다. 따라서 함인정이 사료에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왕이 상례(喪禮) 또는 제례(祭禮) 의식을 치르기 위해 일시적으로 창경궁에 머물렀을 때이다.

창경궁의 정전은 명정전(明政殿), 편전은 문정전(文政殿), 침전은 통명전이다. 정전 뒤편에는 편전이 위치하고, 편전 뒤편에는 침전이 위치해야 하지만 창경궁은 배치가 전혀 다르다. 명정전 뒤편에 넓은 마당이 있고, 이 마당 북쪽에 함인정이 위치하였다. 편전인 문정전은 오히려 명정전 남쪽에 위치하고, 침전인 통명전은 명정전 북쪽에 위치하였다. 창경궁에 빈전 또는 혼전이 차려질 경우에는 통명전과 문정전을 이용하였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상제례가 치러질 때 왕이 머물 만한 편전이 없어서 인근 다른 전각들을 편전 대신 사용하였다. 숭문당을 사용한 경우도 있고 함인정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함인정명병소서」에 따르면, 선왕(先王) 때 함인정 북쪽에 오봉병을 설치하고 그 뒤에 협실(夾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모두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함인정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영조 때인데, 특히 1757년(영조 33)부터 1759년(영조 35)까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1757년 3월 26일에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승하하셨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인원왕후의 빈전은 창경궁 통명전에 만들어졌고, 혼전은 문정전에 만들어졌다. 이보다 앞서 2월 19일에는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셨다. 이때 이미 정성왕후의 혼전인 휘령전(徽寧殿)을 문정전으로 정했었지만 상황이 급변해 창경궁 강서원(講書院)으로 변경했다. 이런 까닭인지 영조는 창경궁에 3년간 머물면서 3년상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승정원일기』 1757년 10월 22일자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자신의 거려청(居廬廳)을 공묵합(恭默閤)으로 명명하고 현판을 만들어 걸라는 지시를 내렸다. 거려청이기 때문에 현판에는 테두리를 만들지도 말고 글자도 크게 쓰지 말도록 했다. 앞서 선왕 때 만든 협실이 이때 공묵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3년간 공묵합에 머물면서 함인정과 숭문당은 궁궐의 편전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이때 함인정에서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을 하거나,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 향을 친히 내려주는 의식 등이 이루어졌다. 인원왕후의 신주는 1759년(영조 35) 5월 6일에 종묘에 부묘했고, 6월 3일에는 정성왕후의 신주를 문정전으로 이안했다. 이후 1759년 윤6월 이후에 영조는 창경궁보다는 창덕궁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다. 정조가 작성한 「공묵합기(恭默閤記)」에 따르면, 1759년 왕세손이 된 이후 자신이 항상 공묵합의 북쪽 반 칸짜리 협실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영조가 창덕궁으로 옮겨간 다음에 정조가 공묵합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1830년(순조 30)에 창경궁에 화재가 발생했다(『순조실록』 30년 8월 1일). 불은 환경전에 발생해서 함인정, 공묵합, 경춘전(景春殿), 숭문당(崇文堂), 영춘헌(迎春軒), 오행각(五行閣), 빈양문(賓陽門)을 연달아 태웠다. 이들 건물의 복구에 대한 것은 1834년(헌종 즉위)에 발간한 『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에 수록됐다. 함인정은 1833년(순조 33) 11월 21일에 상량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함인정은 총 9칸으로 기존 건물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함인정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함인정은 넓은 마당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원래 함인정 좌우에는 담장이 연접해 있었다. 함인정 서쪽 담장에는 홍인문(弘仁門)이 위치하였는데, 홍인문은 2칸으로 구성됐다. 1칸은 솟을대문 형식으로 높게 만든 반면 서쪽 1칸은 평대문으로 높이를 낮게 만들었다. 『창경궁영건도감의궤』에는 2칸 모두 이목지문(二木只門) 형식이라고 기록했다. 홍인문 외에도 좌우 담장에 1칸의 협문이 위치하였다. 오늘날 함인정 내부에는 영조의 「함인정명병소서」와 「함인정추기(涵仁亭追記)」가 게판되었고, 중앙칸 내부 도리에는 도연명(陶淵明)의 「사계절[四時]」이라는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봄에는 물이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 春水滿四澤

여름에는 구름이 기이한 봉우리에도 많도다 / 夏雲多奇峯

가을에는 달이 밝은 빛을 드리우고 / 秋月揚明輝

겨울에는 산등성이에 홀로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 冬嶺秀孤松

참고문헌

  • 『창경궁수리소의궤(昌慶宮修理所儀軌)』
  • 『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동궐도(東闕圖)」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 2, 서울학연구소, 1996.
      1. 그림1_00017964_「동궐도」, 함인정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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