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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3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함경남도 단천군에 속한 보(堡).

개설

오을족보는 함경남도의 단천과 함경북도 내지의 길주(吉州) 사이에 위치한다. 조선 건국 초에는 길주목(吉州牧)에 속하였으나, 세조대에 이르러 함경도를 북도와 남도로 나누면서 함경남도 단천에 예속되었다. 처음에는 구자(口子)가 설치되어 권관(權管)을 두었으나 중종대에 병마만호를 두어 절제하도록 했다. 인조대 이후 여진 번호(藩胡)들이 건주여진(建州女眞)에 복속하여 이동하면서 전략적인 가치가 낮아졌다. 경종대에 이설 논의가 나타나 영조 즉위년에 호타리(胡打里)로 옮겨졌다.

위치 및 용도

오을족보는 함경남도 단천군 두일사(斗日社)에 있었는데, 함경북도 길주와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다. 조선초기에 단천은 길주목에 속했는데, 오을족이라는 명칭은 길주 두일리(豆日里)의 오을족현(吾乙足峴)에서 유래했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단천군]. 오을족보는 올족보(兀足堡), 용족보(龍足堡)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세종대에 구자를 설치했고, 성종대에 이르러 석축으로 보성(堡城)을 쌓게 된다. 오을족보는 중종대에 남쪽으로 60리(약 23.6㎞) 정도 내려간 지점에 신설된다. 함경북도와 남도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특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을 통해 함경남도 내지로 향하는 여진족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 건국 초 오을족은 함길도 길주목 단천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세조대에 이르러 길주와 갑산을 통하는 길목이라 하여 오을족, 쌍청(雙靑) 등지에 보를 설치하여 상호 응원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구축하자는 논의가 나타났다(『세조실록』 8년 9월 3일)(『세조실록』 8년 9월 3일). 당시 도체찰사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오을족 등에 보를 설치하는 것은 적의 차단에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진족의 약탈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영북진(寧北鎭)의 설치를 대안으로서 강조했다. 세조가 한명회의 의견에 찬동하면서 오을족보의 설치는 미루어졌다(『세조실록』 8년 9월 20일).

1467년(세조 13)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정벌을 계기로 오을족보의 중요성이 재차 강조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여진족이 보복성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고, 이로 인해 함경남도와 북도의 통합 방어체제를 구축하자는 논의가 나타났다. 오을족보 등은 이와 관련하여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세조실록』 13년 12월 10일)(『예종실록』 즉위년 11월 24일). 성종대에 이르러 오을족보 안에 샘이 없다는 이유로 퇴축이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아, 오을족보는 1462~1475년 사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6년 9월 17일). 1490년(성종 21) 단천군의 북쪽 160여 리(약 63㎞)에 있던 오을족보를 남쪽으로 60리가량 내려서 새로운 보를 석축으로 구축하였는데, 높이 10척, 길이 827척 규모였다(『성종실록』 21년 3월 30일). 1528년(중종 23) 의정부에서는 오을족보에 권관을 두었던 것을 혁파하고 만호 혹은 첨절제사로 올리자고 건의했다(『중종실록』 23년 8월 13일). 오을족보는 함경남·북도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데다 토병의 수도 많아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시되었다(『명종실록』 21년 10월 24일).

오을족보는 선조대~인조대에 걸쳐 두만강의 번호들이 후금에 복속되면서 그 중요성이 사라졌다. 또 지세가 험하고 땅이 척박하여 점차 거주민의 수가 줄어갔다. 이로 인해 오을족보는 수차례 폐지가 논의되다가 1723년(경종 3)에 이르러 호타리로 이설하여 성진(城津)과 표리를 이루도록 했다(『경종실록』 3년 4월 13일). 이듬해에는 호타리보를 두고 여기에 병마만호를 두게 되었다(『영조실록』 즉위년 11월 27일). 호타리보는 1745년(영조 21)에 윤용(尹瑢)의 건의에 따라 이동진으로 합설되어 군병과 군기를 모두 옮기게 되었다.

형태

오을족보는 이전의 구보(舊堡)와 중종대에 새로 지은 신보(新堡)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구보와 신보는 모두 석축이었다. 옛 오을족보는 둘레가 1,800척(약 545.5m), 높이가 9척(약 2.7m)이었으며, 신보는 860보, 높이 8척(약 2.4m) 정도로 『성종실록』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의 높이는 3m 정도이고, 둘레가 870m로서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라고 하는데 이는 오을족구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구보와 신보에는 모두 봉수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선향토대백과』,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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