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작헌문선왕의(視學酌獻文宣王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왕이 성균관(成均館)문묘(文廟)에서 문선왕(文宣王)에게 술을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를 살피는 시학(視學) 의절.

개설

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문묘에서 문선왕, 즉 공자(孔子)의 신위에 술을 올린 다음,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 상황을 살펴보는 의식의 절차이다. 왕이 성균관에서 거행하는 또 다른 의절인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와 비교해 보면, ‘향문선왕시학의’에는 향사(享祀), 즉 제사 의절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시학작헌문선왕의’는 공자의 신위에 술을 올리는 작헌(酌獻)만 거행할 뿐 그 외의 제사 절차는 생략되어 있는 차이가 있다.

연원 및 변천

‘시학작헌문선왕의’가 처음 논의된 것은 세종대로, 1418년(세종 즉위) 11월에 예조(禮曹)에서 왕이 성균관에서 시학할 때 문선왕에게 술을 올리는 의절을 정하여 왕에게 보고했고, 세종이 이를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21일). 이후 이 의절 내용을 바탕으로 제도적인 보완과 정비를 거쳐 『세종실록』「오례」에 ‘시학작헌문선왕의(視學酌獻文宣王儀)’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이 의식의 명칭이 ‘작헌시학문선왕의(酌獻視學文宣王儀)’로 바뀌었으나, 의식 절차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한편, 『세종실록』 「오례」 단계에서는 왕이 문묘에서 주관하는 의식이 ‘시학작헌문선왕의’ 하나밖에 없었지만, 『국조오례의』 단계에서는 ‘작헌시학문선왕의’ 외에 왕이 문선왕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다음 시학을 하는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가 새로 추가되었다. 대한제국기에 편찬된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작헌문묘시학의(酌獻文廟視學儀)’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절차 및 내용

행사 하루 전에 문묘와 성균관 학당의 안팎을 청소하였고, 왕과 왕세자가 머무는 장막을 정해진 위치에 설치하였다. 행사 당일에는 왕과 왕세자의 판위(版位) 및 전작관(奠爵官), 집사(執事), 문무 관료, 시강관(侍講官), 학생들의 자리[位]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향로(香爐)·향합(香盒)과 제기(祭器) 등을 격식대로 진설하였다. 또, 이날 왕은 궁궐을 나와 성균관으로 행차했는데, 행차할 때의 의장(儀仗)은 법가노부(法駕鹵簿)를 사용하였다.

작헌 의식을 보면, 먼저 제사에 필요한 시설물 설치나 제단의 청소 등을 맡은 전사관(典祀官)이 제사 음식을 담을 찬구(饌具)를 차린 다음 왕세자와 문무 관료, 전작관, 학생 등이 각각 자신의 자리로 나갔다. 이어 왕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판위로 나갔다. 왕이 먼저 4배(四拜)를 하면, 왕세자 이하도 이를 따라 4배를 실시하였다. 왕이 문선왕의 신위에 나가 향과 술을 올린 다음 판위로 돌아오면, 이어 배위전작관(配位奠爵官)이 문선왕의 배위(配位)인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 안자(顔子),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자(曾子), 기국술선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자(孟子) 등 4성(四聖)에게 차례로 향과 술을 올렸다. 다음으로 종향전작관(從享奠爵官)이 동무(東廡)·서무(西廡)의 종향신위(從享神位)에 향과 술을 올렸으며, 이어 왕과 왕세자 이하 참여자들이 4배를 함으로써 의식을 마쳤다.

시학 의식은 명륜당(明倫堂)에서 실시하였다. 왕이 시복(時服)으로 갈아입고 명륜당의 어좌(御座)에 나가면 왕세자가 들어와 왕에게 4배를 하고, 시강관·강서관(講書官)·학생 등도 4배를 하였다. 왕이 시강관에게 술잔을 받아 마시고, 이어 강서관 이하와 학생들도 술잔을 받아 마셨다. 시강관 중에 우두머리인 반수(班首)가 다시 왕에게 술잔을 올린 후 시강관 이하가 4배를 하였다. 시강관·학관·학생들이 자리를 정한 후, 강서관이 이날 강할 서책 내용에 대해 강론을 하면 그에 대해 시강관이 논변을 하였다. 강을 마치면 왕세자와 시강관 이하가 모두 4배를 하였다. 시학이 끝나면 왕은 장막으로 돌아왔다가 궁으로 환궁하였다.

한편, 중종대에는 위와 같은 시학 의절에서 함께한 신하들[侍臣]에게 술을 내리는 의식이 빠진 것과 시강관의 수가 너무 많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에 중종은 시신에게 술을 내리는 일은 대신과 예관(禮官)이 의논하여 결정하고, 입시하는 시강관의 인원은 알맞게 다시 정하도록 지시하였다(『중종실록』 15년 윤8월 12일). 하지만 이후 더 이상의 관련 기록이 없어서 최종적인 정리 결과는 확인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한예전(大韓禮典)』
  •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석전대제』,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