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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7 기준 최신판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올리는 제사.

개설

사직제는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의 제사와 함께 조선시대 국가 사전(祀典) 체계에서 대사(大祀)로 편제된, 가장 격이 높고 중요한 제사였다. 사직제는 전통시대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사이다. 국가는 백성, 즉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데, 사람은 토지가 없으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토지와 곡식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반드시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백성들이 깃들어 살 수 있게 해 주고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토지와 곡식의 공덕에 보답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나라 안의 토지는 광활하기 때문에 모든 땅에 대해 공경을 표시할 수 없고, 곡식은 종류가 많아서 모든 곡식에 두루 제사를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흙을 쌓아 ‘사단(社壇)’을 만들어서 토지의 공에 보답하고, ‘직단(稷壇)’을 세워 제사를 올림으로써 곡식의 공에 감사했다. 이것이 조선을 비롯하여 전통시대 유교 문화권의 모든 나라들이 사직제를 시행한 이유이다. 즉, 사직제는 전통시대 국가에서 농업이 갖는 중요성과 경제적 민생 안정을 위한 왕의 책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사였다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 사직제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백제는 서기 2년(백제 온조왕 20)에 땅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설치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391년(고구려 고국양왕 8)에 평양에 국사(國社)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서 『양서(梁書)』에는 고구려는 겨울에 사직에 제사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에서는 783년(신라 선덕왕 4) 경주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 사직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사직제의 실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에서는 991년(고려 성종 10) 개성의 불은사(佛恩寺) 서동(西洞)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처음 조성했으며, 1052년(고려 문종 6)에 다시 개성 안의 서쪽에 새로운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고려의 사직제는 환구단(圜丘壇)·방택(方澤)·종묘와 함께 대사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사직제에는 국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친제(親祭) 의식이 없고 신하들이 대신 거행하는 섭행(攝行)이 원칙이었으며, 대사이면서도 제사에서 사용하는 희생(犧牲)은 대사의 규정인 소·양·돼지를 각 1마리씩 희생으로 쓰는 태뢰(太牢)가 아니라 소사(小祀)에 적용되는 돼지 1마리를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한양 천도 이후인 1395년(태조 4) 1월에 새로운 사직단을 조성하였다(『태조실록』 4년 1월 29일). 사직단은 한양의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에 조성됐는데, 이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종묘는 궁의 왼쪽에 있고 사직은 궁의 오른쪽에 있다는 『주례(周禮)』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오른쪽에 조성한 것이다. 이후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고제(古制) 연구 등을 통해 사직제의 각종 절차와 제도를 정비했는데, 그 결과 사직제의 의식을 ‘친제사직의(親祭社稷儀)’·‘제사직섭사의(祭社稷攝事儀)’·‘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주현제사직의(州縣祭社稷儀)’ 등의 네 가지로 정비하였다. 성종대에 관련 의례가 더욱 정비되어 ‘춘추급납제사직의(春秋及臘祭社稷儀)’·‘춘추급납제사직섭사의(春秋及臘祭社稷攝事儀)’·‘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주현춘추제사직의(州縣春秋祭社稷)’ 등으로 명칭과 의식의 내용이 구체화되었다. 한편, 세종대에는 사직 관리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사직서(社稷署)가 설치되었다(『세종실록』 8년 6월 9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큰 피해를 입었던 사직은 숙종대 이후 제도 정비가 추진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이에 따라 사직제 역시 정상적인 거행이 가능해졌다. 한편 숙종대에 처음으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인 기곡제(祈穀祭)가 사직에서 거행되었는데(『숙종실록』 22년 1월 4일), 이후 이것이 정착되어 영조대에는 기곡제가 사직의 정식 제사로 규정되었다. 정조대에는 사직의 연혁 및 사직제의 각종 제도와 절차 등을 정리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도 편찬되었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사직신의 명칭을 황제국의 격에 맞게 ‘국사(國社)’·‘국직(國稷)’에서 ‘태사(太社)’·‘태직(太稷)’으로 바꾸는 등의 제도적인 수정이 일부 있었지만, 사직제의 절차 및 내용 등은 별다른 변화 없이 조선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에 시행된 사직제는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제사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부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제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정기 제사로는 매년 2월과 8월에 거행하는 춘추대제(春秋大祭)와 12월에 실시하는 납일제(臘日祭)가 있다.

춘추대제는 각각 음력 2월과 8월의 상무일(上戊日), 즉 그달에서 간지(干支)에 ‘무(戊)’ 자가 들어가는 첫 번째 날에 시행하였다. 또, 납일제는 이름 그대로 납일(臘日), 즉 동지(冬至) 이후 세 번째 미일(未日)에 올리는 제사이다. 춘추대제와 납일제는 국왕이 주관하는 친제(親祭)와 대신들이 대신 주관하는 섭행(攝行) 모두 대사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춘추대제와 납일제는 제사를 주관하는 국왕과 제관(祭官)들이 먼저 7일 간의 재계(齋戒)를 한 다음 거행되었으며, 제사 의식은 ‘신을 맞이하는 의식인 영신(迎神)→신에게 폐백을 드리는 의식인 전폐(奠幣)→제사 음식을 올리는 의식인 진찬(進饌)→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작헌(酌獻)→헌관이 복주를 마시는 의식인 음복(飮福)→제사에 쓴 제기를 거두는 의식인 철변두(徹籩豆)→신을 보내는 의식인 송신(送神)→축판과 폐백을 예감에 묻는 의식인 망예(望瘞)의 순으로 거행되었다.

부정기적인 제사로는 국가의 중대사를 사직신에게 고하는 각종 고유제(告由祭)와 가뭄이 들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올 때 지내는 기우제(祈雨祭)·기청제(祈晴祭) 등이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이들을 합하여 ‘기고(祈告)’로 분류했으며, 소사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한편 숙종대에 처음 시행된 이후 영조대에 사직의 정기 제사로 편입된 기곡제는 매년 정월(正月)에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정기 제사라고 할 수 있다. 기곡제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 친제는 대사, 섭행은 소사로 규정되었다가, 1787년(정조 11)에 이르러 정조의 명에 따라 섭행도 대사로 승격되었다.

사직제는 수도 한성에서만 거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방의 각 주현(州縣)에서도 시행되었다. 지방 주현에서의 사직제는 그 지역의 수령(守令)이 주관하여 시행하였으며, 매년 2월과 8월의 춘추제사만 거행되었을 뿐 12월의 납일제는 시행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직대제』, 민속원, 2007.
  • 김동욱, 『종묘와 사직』, 대원사, 1990.
  •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 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정옥자 외, 『조선시대문화사(상)』, 일지사, 2007.
  • 박례경, 「조선시대 국가 전례에서 社稷祭 의례의 분류별 변화와 儀註의 특징」, 『규장각』29, 2006.
  • 이욱, 「조선후기 祈穀祭 설행의 의미-장서각 소장 사직서의궤와 등록을 중심으로-」, 『장서각』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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