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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6 기준 최신판



사람이 죽은 뒤 1주기에 행하는 불교식 재 의식.

개설

소상재(小祥齋)는 선왕과 선후(先后)의 사후(死後) 1주기(週忌)에 지내는 왕실의 재 의식을 말한다. 재(齋)는 제사의 불교식 표현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와 불교의 두 가지 제사 문화가 병존하였다. 국가에서 억불 정책을 시행한 까닭에 종단과 사찰, 승도 등은 축소되었지만, 불교식 상례(喪禮)와 장례 의식 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유교식 제사는 ‘제(祭)’라 하고, 불교식은 ‘재(齋)’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데, 통칭할 때는 ‘기신제재(忌晨祭齋)’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태종실록』 9년 8월 1일).

소상재는 선왕과 선후(先后)의 사후(死後) 1주기에 지내는 왕실의 불교식 제사 의식을 가리키며, 2주기에 지내는 재는 대상재라고 한다. 그에 비해 유교식 제사는 각각 소상제, 대상제라고 표현한다. 탈상(脫喪)한 뒤 지내는 제사를 통틀어 기신제(忌晨祭) 또는 기신재(忌晨齋)라고 하는데, 소상재를 소상기신재(小祥忌晨齋)로 표현하기도 했다.

연원 및 변천

소상제 즉 사후 1주기에 지내는 유교식 제사는 궁궐 안의 문소전(文昭殿), 광효전(廣孝殿), 경안전(景安殿) 등의 전각이나 능(陵)에서 거행하였다. 반면 불교식 소상재는 모두 사찰에서 지냈다. 1470년(성종 1) 예종의 소상재를 정인사(正因寺)에서 시행했다는 사실(『성종실록』 1년 11월 28일)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초재(初齋)와 대상재 등은 장의사(藏義寺)·대자암(大慈庵)·진관사(津寬寺)·회암사(檜巖寺) 등 여러 사찰에서 돌아가며 지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초재·소상재·대상재 등은 특정 사찰이 아니라 그때마다 왕실에서 지정한 사찰에서 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8년(태조 7)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대상재는 흥천사(興天寺)흥복사(興福寺) 두 곳에서 거행되기도 하였다. 세종 연간에는 선왕의 기신재는 내자시(內資寺)가 맡아 장의사(藏義寺)에서 지내고, 선후의 기신재는 내섬시(內贍寺)가 맡아 진관사에서 지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년 1월 19일).

한편 사찰에서 지내는 재 의식은 유신(儒臣)들의 잦은 반대에 부딪혔다. 1470년(성종 1)에는 예종의 소상재를 정인사에서 설행하였는데, 같은 날 성종은 경안전에서 유교식으로 또 다른 소상제를 지냈다. 이처럼 같은 제사를 두 곳에서 각각 불교식, 유교식으로 지내다 보니 신하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또 1495년(연산군 1)에는 성종의 소상재를 지내려 하자, 대신들이 불가를 숭상하는 일이라며 중지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대상재 때도 반발은 여전했지만, 연산군은 끝내 불교식 재를 강행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12월 22일).

소상재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연산군대까지만 보인다. 그런데 대상재에 관한 기록이 1516년(중종 11)까지 계속되고 있으므로, 소상재 역시 이 무렵까지 지속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불교식 재 의식은 이후 『주자가례』가 확산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16세기 중반인 명종 연간에 불교의 중흥과 함께 각종 기신재가 다시 설행되었으나, 이후에는 소멸되었다.

절차 및 내용

사찰에서 설행하는 소상재에는 왕이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태종이 흥천사에서 거행한 신덕왕후의 대상재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만, 소상재에 참석한 경우는 없었다. 왕은 궁궐에서 지내는 유교식 소상제에 참석하였다. 그 대신 사찰에는 세자와 신하를 보냈다. 대상재의 경우 그 비용은 인순부(仁順府)·인수부(仁壽府)·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 등에서 부담하였으며, 대군과 승지, 예조의 당상관 등이 참예하였다. 소상재의 절차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일재, 소상재, 대상재 등을 정확히 표현하지 않고 그저 기신재라고만 기록해 놓은 사례가 많다. 따라서 그 절차는 기신재의 일반적인 과정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에서 지내는 기신재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① 기일 전날 저녁, 승려들이 선왕과 선후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의식을 거행하고 신주(神主)에 모신다. ② 기일 아침에 신주를 욕실(浴室)에서 깨끗이 목욕시킨다. ③ 장식이 없는 평상[白平床] 위에 목욕시킨 신주를 놓는다. ④ 신주가 놓인 평상을 들고 옆문을 통해 불상 앞으로 옮긴다. 이때 승려들이 둘러서서 징과 북을 두드리며 신주를 맞아들인다. ⑤ 신주를 사용하여 불상에 예배하는 동작을 하게 하고, 소문(疏文)을 읽어 복을 빈다. ⑥ 의식이 모두 끝나면 의례에 사용된 음식은 승려와 재주(齋主), 신하 등의 순서로 시식한다. 그 후 다시 유교식 제사를 시작한다. ⑦ 제사를 모두 마치면 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 행사를 진행한다.

이와 같은 기신재의 의식은 특정한 절차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수륙재(水陸齋)와 영산재(靈山齋)의 의식을 따랐다. 영혼을 천도하는 대표적인 불교 의식이 수륙재와 영산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수륙재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국가의 공식 의례였으므로 대상재의 의식으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사찰에서 소상재 등이 열리는 날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재를 마친 뒤 반승을 거행하므로 8,000~9,000명에 이르는 승려가 모였고, 구경꾼과 걸인까지 합하면 거의 20,0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8년 3월 29일). 더불어 소상재는 망자를 기리는 엄숙한 의식이었지만, 범패와 나비춤 등의 작법무가 펼쳐지는 큰 구경거리이기도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왕실의 불교식 재는 점차 사라졌지만, 18세기 후반까지 각종 기신재가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참고문헌

  • 김탁, 「조선전기의 전통신앙-위호와 기신재를 중심으로」, 『종교연구』6, 한국종교학회, 1990.
  • 김희준, 「조선전기 수륙재의 설행」, 『호서사학』30, 호서사학회, 2001.
  • 심효섭, 「조선전기 기신재의 설행과 의례」, 『불교학보』40,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3.
  • 이현진, 「조선 왕실의 기신제 설행과 변천」,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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