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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4 기준 최신판



창경궁에 있던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경모전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혼전이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의 딸이다. 인순왕후는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에 해당하였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모(敬慕)’로 정하고(『선조실록』 8년 1월 11일), 4개월 뒤 강릉(康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명종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경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75년(선조 8) 1월 2일 인순왕후가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승하하자 그곳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4월에 강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이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해 둔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선조수정실록』 8년 4월 28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모전이다.

인순왕후의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되었다(『선조실록』 8년 1월 10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인순왕후의 국장(國葬)과 관련하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명종의 능인 강릉에 부장(祔葬)한 뒤 우주(虞主)를 경모전에 봉안한 기록은 있지만 우제(虞祭)를 지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우주는 뽕나무로 만들며, 장지(葬地)에서 신주에 글을 써서 연제 때까지 혼전에 봉안한 뒤 종묘(廟)의 북쪽 계단 사이[階間]에 매안하는 신주이다.

선조는 경모전에서 졸곡제(卒哭祭)·연제·대상제(大祥祭)를 지냈으며, 담제는 섭행(攝行)하고, 부제(祔祭)는 친행하였다(『선조실록』 10년 3월 12일). 아침 상식(上食)과 별다례(別茶禮), 동향대제(冬享大祭)를 경모전에서 행한 기록은 있으나, 이를 제외한 신주와 위판(位版)에 글을 쓰는 절차 등을 거행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577년(선조 10) 3월 12일에 인순왕후의 신주를 경모전에서 옮겨 와서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이때의 신주는 연제 때 마련한 연주(練主)이다. 연주는 밤나무로 만들며, 혼전에서 신주에 글을 써서 담제를 지나 최종 종묘에 봉안하는 신주이다. 따라서 경모전은 인순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75년 4월 28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577년 3월 12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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