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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소용정씨|한글표제=소용정씨|한자표제=昭容鄭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세종~문종|집필자=정주영|자=|호=|봉작=소용(昭容)|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사망=|본관=동래(東萊)|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증조부=정부(鄭符)|조부=정흠지(鄭欽之)|부=정갑손(鄭甲孫)|모_외조=강릉 김씨(江陵金氏) : 김양남(金揚南)의 딸|형제=(오라버니)정우(鄭俁), 정숙(鄭俶) (남동생)정오(鄭烏) (여동생)이중원(李重元)의 처,  조이(趙怡)의 처, 이순(李洵)의 처, 안종도(安從道)의 처, 권록(權祿)의 처, 안신(安信)의 처, 채윤공(蔡允恭)의 처|처_장인=(남편)문종(文宗) →(자녀)1남|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7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4009_001 『세종실록』 9년 4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7020_003 『세종실록』 11년 7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10015_002 『세종실록』 11년 10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0026_002 『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1019_006 『세종실록』 13년 1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2007_002 『세종실록』 13년 2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2012_001 『세종실록』 13년 2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3013_003 『세종실록』 13년 3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6006_002 『세종실록』 28년 6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806026_007 『문종실록(文宗實錄)』 8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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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 = ?]. 조선 5대 임금인 문종(文宗)의 후궁.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낸 정갑손(鄭甲孫)이며, 어머니는 김양남(金揚南)의 딸인 강릉 김씨(江陵金氏)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 사(中樞院使)를 지낸 정흠지(鄭欽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정부(鄭符)이다. 오라버니는 정우(鄭俁), 정숙(鄭俶)이고, 남동생은 정오(鄭烏)이다. 여동생은 이중원(李重元)의 처, 순창인(淳昌人) 조이(趙怡)의 처, 이순(李洵)의 처, 광주인(廣州人) 안종도(安從道)의 처, 권록(權祿)의 처, 광주인(廣州人) 안신(安信)의 처, 평강인(平康人) 채윤공(蔡允恭)의 처이다. 슬하에 1남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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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인조 1) = ?].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후궁.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상헌(鄭象獻)이며, 어머니는 정상헌의 천첩(賤妾)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순경(鄭純褧)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정사룡(鄭士龍)이다.
  
=='''문종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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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후궁'''==
  
정소용(鄭昭容)은 아버지인 정갑손(鄭甲孫)과 어머니인 김양남(金揚南)의 딸인 강릉 김씨(江陵金氏)와의 사이에서 3남 8녀 중의 장녀로 태어났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휘빈(徽嬪)에 봉하였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4009_001 『세종실록』 9년 4월 9일]) 김휘빈은 문종에게 압승술(壓勝術)을 사용하다가 발각되어 폐출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7020_003 『세종실록』 11년 7월 20일]) 그 후 1429년(세종 11년) 세종은 두 번째 세자빈을 봉려(奉礪)의 딸로 삼고 순빈(純嬪)으로 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10015_002 『세종실록』 11년 10월 15일]) 그러나 봉순빈과 문종의 사이가 좋지 않자 후사를 걱정한 세종은 세자인 문종의 후궁을 들이기로 결정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0026_002 『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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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용(鄭昭容)이 언제 광해군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정숙원(鄭淑媛)이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전에 이미 숙원의 첩지를 받고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9002_004 『광해군일기』 9년 9월 2일]) 숙원을 거쳐 이후 소용(昭容)에 오른 그녀는 교태를 잘 부리고 일에 익숙하여 출입하는 문서를 관리하고 임금을 대신하여 계하(啓下)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믿음이 두터웠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12030_002 『광해군일기』 5년 12월 30일])
  
1431년(세종 13) 세종은 세자인 문종의 후궁을 간택하였는데, 가산군지사(嘉山郡知事)권전(權專),직예문관(直藝文館)정갑손(鄭甲孫),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홍심(洪深)의 딸을 선택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1019_006 『세종실록』 13년 1월 19일]) 이어 세종은 정갑손을 장령(掌令)으로 삼고,([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2007_002 『세종실록』 13년 2월 7일]) 쌀과 콩 30석을 내려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2012_001 『세종실록』 13년 2월 12일]) 얼마 후 정갑손의 딸인 정소용(鄭昭容)은 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승휘(承徽)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3013_003 『세종실록』 13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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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발하자 정소용은 반정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4_003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14_001 『인조실록』 1년 9월 14일])
  
정소용은 문종과의 사이에서 1남을 낳은 것으로 보이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6006_002 『세종실록』 28년 6월 6일]) 아들을 낳은 후 승휘에서 소용(昭容)으로 진봉(進封)된 것으로 여겨진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806026_007 『문종실록(文宗實錄)』 8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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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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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용의 무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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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용은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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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문종실록(文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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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仁祖實錄)』       
*『선원계본기략(璿源系譜記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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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지두환, 『문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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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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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       
  
[[분류:왕족]][[분류:후궁]][[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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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7 판




총론

[?~1623년(인조 1) = ?].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후궁.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상헌(鄭象獻)이며, 어머니는 정상헌의 천첩(賤妾)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순경(鄭純褧)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정사룡(鄭士龍)이다.

광해군의 후궁

정소용(鄭昭容)이 언제 광해군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정숙원(鄭淑媛)이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전에 이미 숙원의 첩지를 받고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광해군일기』 9년 9월 2일) 숙원을 거쳐 이후 소용(昭容)에 오른 그녀는 교태를 잘 부리고 일에 익숙하여 출입하는 문서를 관리하고 임금을 대신하여 계하(啓下)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믿음이 두터웠다고 한다.(『광해군일기』 5년 12월 30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발하자 정소용은 반정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인조실록』 1년 9월 14일)

묘소와 후손

정소용의 무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정소용은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