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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9 기준 최신판




총론

[1591(선조 24)∼1656(효종 7) = 66세]. 조선 후기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 때의 문신. 의주부윤(義州府尹)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시보(施甫), 호는 취죽(翠竹)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심대형(沈大亨)이며,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중겸(韓重謙)의 딸이다.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낸 심연(沈演)의 동생이기도 하다.

광해군~인조 시대의 활동

1616년(광해군 8) 진사(進士)가 된 심택(沈澤)은 1624년(인조 2)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선발되었고, 이어 이인찰방(利仁察訪)을 역임하였으며, 1627년(인조 5)에는 참봉(參奉)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인 1628년(인조 6)에는 사섬시(司贍寺)에서 전중(殿中)을 거쳐 1629년(인조 7)에는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7 「감사심공갈명(監司沈公碣銘)」]

그러던 가운데 1635년(인조 13)에 형조 좌랑(佐郞)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 을해(乙亥) 증광시(增廣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그리고 1636년(인조 14)에는 예조 좌랑으로 옮기고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갔다. 부안현감으로서의 3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심택은 1639년(인조 17) 다시 예조 좌랑이 되었으나, 곧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옮겼고, 이듬해인 1640년(인조 18)에는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인조실록』인조 17년 12월 25일] 이어 1641년(인조 19)에는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갔는데, 1642년(인조 20)에 형 심연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자 일정 범위 내의 친척이 같은 관청 혹은 통속 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한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심택은 조정으로 돌아와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이 되었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그리고 1646년(인조 24)에는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고, 1647년(인조 25)에는 군기시(軍器寺)정(正)에 제수되었다. 이어 양주목사(楊州牧使), 성균관 악정(樂正),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을 지낸 뒤 다시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으며,[『인조실록』인조 25년 11월 30일, 『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이듬해인 1648년(인조 26) 홍청도(洪淸道)와 전남도(全南道)의 암행어사로 활약하여, 각 도의 지방관들에게 상벌을 내릴 근거를 제공하였다.[『인조실록』인조 26년 2월 17일] 이후 예빈시(禮賓寺) 정(正)으로 옮겼다가, 1648년(인조 26) 가을 의주부윤이 결원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문관 출신으로 국방을 담당할 자를 추천했는데, 그 가운데 심택이 첫째로 뽑혀 의주부윤이 되었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효종 시대의 활동

효종이 왕위에 오른 뒤 심택은 의주부윤으로 활동을 하다가,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1년 3월 18일, 효종 1년 윤11월 13일] 그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임 하던 1652년(효종 3) 비변사에서는 심택이 1년 동안 다스린 효과가 뛰어나서 민심이 흡족하게 여기는 것을 볼 때, 전주감사(全州監査)의 직책까지 겸직하여 3년의 임기를 마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하였다. 이에 효종은 심택에게 전라도관찰사 외에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겸직하도록 하였다.[『효종실록』효종 3년 3월 18일, 효종 3년 3월 23일] 이어 1654년(효종 5) 심택은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효종실록』효종 5년 1월 6일, 효종 5년 4월 24일, 효종 5년 8월 24일, 효종 5년 12월 19일]

그런 가운데 1656년(효종 7) 봄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문이 있자, 심택이 평양(平壤)을 떠나 정주(定州)로 가다가 감기에 걸렸고, 의주(義州)로 향하던 중 병이 악화되어 곽산(郭山)에서 병사하였다. 당시 나이 66세였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성품과 일화

심택의 성품에 대해서는 겉은 온화하고 속은 명확하며 부지런하게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과거공부를 할 때부터 다른 사람이 열을 알려고 하면 심택은 그 백 배인 천을 알고자 노력했고, 벼슬을 하여 관리가 되어서는 옳은 도리를 지키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한편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심택은 고을 안을 돌아다니면서 목사(牧使)의 일을 방해하는 자를 잡아들였는데, 관명을 잘 따르는 자는 도와주고 싫어하는 자는 매를 쳤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조경(趙絅)이 백마성(白馬城)으로 귀양을 갔을 때, 고을 사람으로부터 들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을 백성 가운데 박사명(朴思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택을 헐뜯고자 나라의 장단(長短)을 이러쿵저러쿵 험담하였다는 것이다. 박사명은 정명수(鄭命守)의 편에 선 사람으로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심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박사명을 잡아들여 목을 벤 후 군계(郡界) 위에 효수(梟首)하여 두고 조정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주민이 처음으로 국법이 엄중함을 알았고 아전도 처음으로 명령이 두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전해진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묘소와 후손

곽산에서 병사한 심택은 1656년 윤5월 13일 용인현(龍仁縣) 산의곡(山義谷) 아래 해좌(亥坐) 언덕에 안장했는데 현재의 수원시 이의동이다.

후손으로는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는데, 『동각산록(東閣散錄)』의 저자인 김군석(金君錫)과 혼인하였다. 아들을 두지 못하여 친족인 심서규(沈瑞奎)를 양자로 들였으나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심택의 형인 심연의 아들 심서견(沈瑞肩)의 둘째 아들 심윤원(沈胤元)을 심서규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용주유고』 권17 「감사심공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설봉유고(雪峯遺稿)』
  • 『용주유고(龍洲遺稿)』
  • 『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