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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3 기준 최신판




총론

[1498년(연산군 4)∼1548년(명종 3) = 51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경참(景參)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김희수(金希壽)이고,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삭녕군수(朔寧郡守)양치(梁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양주목사(楊州牧使)김숙연(金叔演)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자행(金自行)이다. 정사룡(鄭士龍)과 절친한 사이였다. 서법이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따랐는데, 매우 뛰어나서 당시 조정의 모든 전책(典冊)은 물론 경대부(卿大夫)의 비갈(碑碣)마저 그가 썼다.

중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28세가 되던 1525년(중종 20)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차례에 따라서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얼마 뒤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고, 3년 상례를 끝마친 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1530년(중종 25)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가, 1531년(중종 26)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 25년 7월 14일),(『중종실록』 26년 1월 12일) 이때 척신 김안로(金安老)를 유배에서 풀어주는 것에 반대하는 바람에 이후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기용되면서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을 갔다.[『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유명조선국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김공묘갈명(有明朝鮮國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墓碣銘)」 이하 「김노묘갈명」으로 약칭],(『중종실록』 26년 3월 12일)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고 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김노는 귀양에서 풀려나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고, 이어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다가 1539년(중종 34)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34년 8월 4일) 1540년(중종 35) 가을에 동료들과 농담으로 한 말이 당시의 우찬성(右贊成)성세창(成世昌)에게 저촉이 되었는데, 좌찬성소세양(蘇世讓)이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부본(副本)에서 글자가 삐뚤고, 또 글자의 크기도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바람에 그 글씨를 썼던 사자관(寫字官)김노는 체직되고 품계도 낮추어졌다.(『중종실록』 34년 8월 5일) 이때 성세창의 당질 성순(成詢)이 좌찬성소세양을 부추겨서 김노를 중상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중종실록』 39년 8월 4일) 이에 김노는 좌천되어 서반직(西班職)의 사과(司果)에 임명되었다.[「김노묘갈명」]

1541년(중종 36)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중종실록』 36년 7월 10일),(『중종실록』 36년 10월 8일) 이때부터 중종 말년인 1544년(중종 39)까지 그는 경연청(經筵廳) 시강관(侍講官), 홍문관 교리(校理), 홍문관 응교(應敎),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의정부 검상(檢詳), 의정부 사인(舍人), 봉상시(奉常寺)첨정(僉正), 사헌부 집의(執義), 사헌부 장령,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종부시(宗簿寺)정(正), 사복시(司僕寺) 정, 군자감(軍資監) 정, 내섬시(內贍寺) 정을 역임하였다.[「김노묘갈명」]

인종~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7월 인종(仁宗)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었다.(『인종실록』 1년 윤1월 18일),(『명종실록』 즉위년 10월 17일) 1546년(명종 1)에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어, 문정왕후의 명에 따라 임금이 억제하고 경계해야 할 『억계(抑戒)의 글』을 병풍에 써서 명종에게 바쳤다.(『명종실록』 1년 2월 15일),(『명종실록』 1년 4월 29일) 1547년(명종 2) 내섬시 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한직인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로 옮겼다.(『명종실록』 2년 1월 22일),(『명종실록』 2년 6월 26일)

그는 신병이 많아서 휴식을 취하느라고 항상 병가(病暇) 상태였기 때문에 관직에 심력을 다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겨,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 행차에 끼이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천추절(千秋節)의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었으나, 요동(遼東)·북경(北京)으로 가는 험난한 길 때문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돌아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병이 다시 도지는 바람에 1548년(명종 3) 10월 23일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겨우 51세였다.

한편 그의 집안은 모두 문학과 서예로 후세에 저명하였다. 아버지 김희수는 해서(楷書)에 능하였는데,[『해동잡록(海東雜錄)』 권상] 김노도 필법이 아름다웠으므로, 김희수와 김노 부자를 두고 동진(東晋)의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같다고 칭송하였다.[「김노묘갈명」] 중종과 인종의 국상 때에는 종묘의 신주와 원릉(園陵)의 묘지명(墓誌銘)을 모두 김노가 썼다. 그는 서법 연구뿐만 아니라, 각종 책문(冊文)과 유명한 인물의 비문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제안대군이침묘비(齊安大君李琛墓碑)」, 경기도 파주에 있는 「청송성수침묘비(聽松成守琛墓碑)」,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민첩함이 뛰어났고, 의론(議論)이 특이하여 영의정송질(宋軼)이 크게 칭찬할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인 김희수도 명성과 인망이 한 시대에 추중을 받을 정도였고, 사물(事物)을 요리하는 능력도 다른 사람이 그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노의 친한 벗인 정사룡은 비문에서 “여러 가지를 따져보면, 아버지 김희수가 아들 김노에게 조금 뒤졌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사귀기를 원하여 그 문전을 찾는 사람이 아버지보다 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김노를 더 높게 쳤다.[「김노묘갈명」]

1531년(중종 26) 김노가 홍문관 저작으로 승진되었을 때, 삼사(三司)에서 심정(沈貞)과 남곤(南袞)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어 있던 김안로를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심정을 탄핵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때 홍문관 저작김노가 초안의 글씨를 옮겨 썼는데, 그 상소 속에 ‘김안로는 공론에 용납되지 않았을 뿐이다’와 조광조(趙光祖)에 대하여 ‘정사(政事)를 어지럽히는 소인(小人)이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노는 붓을 던지고 말하기를 “이 글은 조광조를 논박하는 것이고, 김안로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다”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글씨를 쓰지 않으면서 ‘김안로가 음흉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마침내 그 논의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 해에 김안로가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실권을 잡게 되면서 김노는 문의현으로 귀양을 갔다.[「김노묘갈명」]

그는 평소 형제간의 우애가 아주 도타웠으므로, 동생 김회(金晦)가 일찍 죽자 크게 슬퍼하여 마음에 깊은 병이 생겼다. 처음에 부모가 돌아가고 유산을 나눌 때 본인은 척박한 전답과 낡은 물건만을 가지고 좋은 것은 동생에게 모두 주었다. 또 궁핍한 친척을 구휼할 때 그 집의 살림을 직접 맡아서 생활을 꾸려주기까지 하였다. 장인을 모시던 비녀(婢女)가 유복녀(遺腹女)를 낳자, 김노는 자기가 받았던 유산을 넘겨주면서 의지할 곳으로 삼고 삶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김노는 학문을 닦을 때에는 오로지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고, 남을 대할 때에는 자기의 단점을 숨기지 않았으므로, 남이 자기 단점을 지적하면, 반드시 그 단점을 고치도록 노력하였다. 귀양을 가서는 문을 굳게 닫고 독서에만 열중하며, 선현들의 격언을 손수 적어서 항상 자기를 성찰하였다.[「김노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대방원(大方原)의 선영에 있는데, 정사룡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지금 무덤은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 있다.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한평군(漢平君)이성언(李誠彦)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홍도(金弘度)는 호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문장과 글씨로 유명하다. 장녀는 진사(進士)신효중(申孝仲)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호음유고(湖陰遺稿)』
  • 『호음잡고(湖陰雜稿)』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명재유고(明齋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