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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416년(태종16)∼1465년(세조11) = 50세]. 조선 초기 세조 때 활동한 문신이고, 세조의 책사(策士). 자는 [[정경(正卿)]]이고, 호는 소한당(所閑堂)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의정부 찬성사권근(權近)의 손자이고, 의정부 좌찬성권제(權踶)의 아들이며, 남이(南怡) 장군의 장인이다. 아내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고성이씨(固城李氏)는 영의정이원(李原)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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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년(태종16)∼1465년(세조11) = 50세]. 조선 초기 세조 때 활동한 문신이고, 세조의 책사(策士). 자는 [[정경(正卿)]]이고, 호는 소한당(所閑堂)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의정부 찬성사권근(權近)의 손자이고, 의정부 좌찬성권제(權踶)의 아들이며, 남이(南怡) 장군의 장인이다. 아내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고성이씨(固城李氏)는 영의정이원(李原)의 딸이다.
  
 
=='''소년 시절의 한명회와 교우'''==
 
=='''소년 시절의 한명회와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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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단종 시대 수양대군의 집권 토대 구축'''==
 
=='''문종~단종 시대 수양대군의 집권 토대 구축'''==
  
그는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서 방랑하다가, 35세이던 1450년(문종즉위)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그해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집현전 [[교리(校理)]]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함께 이석형(李石亨)의 『역대병요(歷代兵要)』에 음주(音註)를 달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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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서 방랑하다가, 35세이던 1450년(문종즉위)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그해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집현전 [[교리(校理)]]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함께 이석형(李石亨)의 『역대병요(歷代兵要)』에 음주(音註)를 달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1452년(단종즉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의 의정 대신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권람(權擥)과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신숙주(申叔舟)]] · 정인지(鄭麟趾)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고, 양정(楊汀) · 홍달손(洪達孫) · 유수(柳洙) · 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 일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김종서 · 황보인 등 3정승 6판서와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정권을 잡아서,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궁중 쿠데타는 일찍이 없었으나 권람은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었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특진되었다. 이어 1454년(단종2) 우부승지 ·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452년(단종즉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의 의정 대신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권람(權擥)과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신숙주(申叔舟)]] · 정인지(鄭麟趾)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고, 양정(楊汀) · 홍달손(洪達孫) · 유수(柳洙) · 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 일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김종서 · 황보인 등 3정승 6판서와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정권을 잡아서,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궁중 쿠데타는 일찍이 없었으나 권람은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었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특진되었다. 이어 1454년(단종2) 우부승지 ·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총론

[1416년(태종16)∼1465년(세조11) = 50세]. 조선 초기 세조 때 활동한 문신이고, 세조의 책사(策士). 자는 정경(正卿)이고, 호는 소한당(所閑堂)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의정부 찬성사권근(權近)의 손자이고, 의정부 좌찬성권제(權踶)의 아들이며, 남이(南怡) 장군의 장인이다. 아내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고성이씨(固城李氏)는 영의정이원(李原)의 딸이다.

소년 시절의 한명회와 교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친구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면서 같이 공부하였다. 한명회와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불후의 이름을 남기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가 명산고적을 떠돌아다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권제가 첩에 미혹되어 정실인 어머니 이씨를 박대하고 누이를 폭행한 것에 대한 불평불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종~단종 시대 수양대군의 집권 토대 구축

그는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서 방랑하다가, 35세이던 1450년(문종즉위)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그해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집현전 교리(校理)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함께 이석형(李石亨)의 『역대병요(歷代兵要)』에 음주(音註)를 달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1452년(단종즉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의 의정 대신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권람(權擥)과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신숙주(申叔舟) · 정인지(鄭麟趾)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고, 양정(楊汀) · 홍달손(洪達孫) · 유수(柳洙) · 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 일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김종서 · 황보인 등 3정승 6판서와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정권을 잡아서,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궁중 쿠데타는 일찍이 없었으나 권람은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었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특진되었다. 이어 1454년(단종2) 우부승지 ·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세조 시대의 활동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 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훈되었다. 1456년(세조2)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집현전 대제학을 거쳐서,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로 승진하였다.

1458년(세조4) 신숙주와 함께『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459년(세조5)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세조8)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서 병을 치료하였는데,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세조6)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의 감수 책임을 맡았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所閑堂集)』이 있다. 할아버지 권근(權近)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 태조(太祖)주원장(朱元璋)의 시제(詩題)에 응하여 지은 『응제시(應製詩)』에 그가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應製詩註)』는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국통감』의 편찬 방향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묘소와 사평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미법곡(彌法谷)에 있는데, 신숙주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보한재집(保閑齋集)』 권17) 그는 학문의 폭이 넓고, 뜻이 커서 기발한 생각이 많았으며 활을 잘 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재산을 모아서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보한재집(保閑齋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지퇴당집(知退堂集)』
  • 『눌재집(訥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