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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의 약칭.

개설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는 조선 세종 때 설립된 이후 대도호부와 도호부로의 변천이 자주 있었다. 평안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압록강을 넘어 침략하는 적들은 반드시 영변을 거쳐야 평양으로 갈 수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고, 조선에서는 절도사영을 이곳에 두어 변방을 관리 감독하도록 함으로써 국방 경영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평양부영변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변대도호부는 평안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감영인 평양에서 변경 지역인 의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의주·삭주·벽동 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적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야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강동6주를 개척한 이후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어 방어사를 두어 관할하였다. 청천강을 끼고 있어서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략 때 주요 방어 근거지였으며, 고려말에는 이방실(李芳實)이 이곳에서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한 바 있다. 이러한 군사적 이점으로 조선이 건국한 후에는 세종 때 연산과 무산 지역을 합하여 영변이라 하고 대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여진족을 정벌할 때 평안도의 핵심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평양에서 의주로 몽진하는 과정에서 영변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왕이 의주를 지나 요동으로 넘어가는 문제와 세자인 광해군에게 분조(分朝)하는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춘추관에서 옮겨 온 『조선왕조실록』을 영변부에 보관하였다.

조직 및 역할

영변대도호부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외관직으로 정3품의 대도호부사 1명을 두어 절도사를 겸하도록 했으며, 종5품의 판관 1명과 종9품의 심약(審藥) 1명을 두었으나 『속대전』에는 판관을 모두 없앴으며, 『대전회통』에는 판관을 다시 두고 대도호부사가 절도사를 겸하는 것을 폐지하였다. 부사가 절도사의 업무를 겸직하는 여부에 따라 품계에 변화가 있어 정3품의 대도호부사 혹은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되어 관할하였고, 판관의 설치 여부도 이와 관련이 깊었다. 1462년(세조 8)에는 영변부의 동·서반 토관직을 정하였다. 토관직은 지방의 효율적인 행정 운영과 군사조직 강화를 위해 지역의 토착인을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당시 동반의 토관직으로 도부사(都府司)는 도부(都府) 1명, 승(丞) 1명, 주부 2명이고, 전례국(典禮局)은 영(令) 1명, 녹사(錄事) 2명이고, 전빈서(典賓署)는 주부(注簿) 1명, 직장(直長) 1명, 녹사 2명이고, 군기서(軍器署)는 주부 1명, 녹사 2명이고, 영작원(營作院)은 판관 1명, 녹사 2명이고, 전주서(典酒署)는 직장 1명, 부록사(副錄事) 2명이고, 사창서(司倉署)는 직장 1명, 부록사 2명이고, 수지서(收支署)는 직장 1명, 부록사 2명이고, 사옥서(司獄署)는 직장 1명, 부록사 1명을 두었다. 이것이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도무사(都務司)에 정5품 도무(都務) 1명과 정6품 교부(校簿) 1명, 정7품 전사(典事) 1명을 두고, 전례서(典禮署)에 종5품 장부(掌簿) 1명, 정7품 전사 1명, 종8품 급사(給事) 1명, 종9품 섭사(攝事) 1명을 두고, 융기서(戎器署)와 사창서(司倉署) 및 영작서(營作署)에 종6품 감부(勘簿) 각 1명, 정8품 관사(管事) 각 1명, 섭사 각 1명을 두었다. 수지국(收支局)에는 종7품 장사(掌事) 1명, 섭사 1명을 두고, 전주국(典酒局)에는 급사 1명, 섭사 1명,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2명을 두는 것으로 법제화되었고, 조선후기 『대전회통』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밖에 서반 진변위(鎭邊衛)는 1령(令)은 사직(司直) 1명, 부사직(副司直) 1명, 사정(司正) 1명, 섭사정(攝司正) 1명, 섭부사정(攝副司正) 1명, 사용(司勇) 2명, 섭사용(攝司勇) 2명, 대장(隊長) 7명, 대부(隊副) 10명으로 하고, 2령은 섭사직(攝司直) 1명, 섭부사직(攝副司直) 1명, 섭사정 2명, 섭부사정 2명, 사용 2명, 섭사용 4명, 대장 7명, 대부 10명으로 하고, 3령은 섭사직 1명, 섭부사직 1명, 섭사정 2명, 부사정 2명, 사용 2명, 섭사용 4명, 대장 7명, 대부 10명을 두었다.

변천

영변대도호부는 1428년(세종 10)에 연산부(延山府)와 무산현(撫山縣)을 합병하여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하고 부사와 판관을 두고 부사가 도절제사(都節制使)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에는 영변부의 소속을 삭주도(朔州道)의 중익(中翼)에서 안주도(安州道)의 중익으로 개편하였으며, 토관직을 두도록 하였다.

1433년(세종 15)에 제1차 여진족 정벌을 떠난 최윤덕(崔潤德)이 영변에 거점을 마련하고 머물면서 정벌 작전을 수립한 후 원정에 나섰으며, 승전한 후에는 세종이 영변으로 선온(宣醞)을 보내 위로하였다(『세종실록』 15년 5월 3일). 영변은 평안도의 중앙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압록강 변으로 적이 침입할 경우 신속하게 군대를 움직여 변경에 있는 고을을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1442년(세종 24)에 도절제사영을 강계부에 옮기고, 영변부는 영변군으로 격하하여 종4품의 군수를 두었다. 이후 1446년(세종 28)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가 1447년(세종 29)에 절제사영을 영변으로 다시 옮기고 판도호부사(判都護府使)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도절제사영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1457년(세조 3)에 영변진(寧邊鎭)에는 박천(博川)·개천(价川)·덕천(德川)·은산(殷山)·맹산(孟山)·희천(熙川)을 속하게 하고, 1466년(세조 12)에 대도호부가 되었다. 성종 때는 도절제사영을 자주 옮기지 말고, 압록강이 얼어 적의 침입이 우려될 때는 절제사가 변경을 다니면서 시찰하고, 평상시에는 영변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영변대도호부의 관아 건물로는 객사인 철옹관(鐵甕館)과 아사(衙舍)인 망미헌(望美軒), 관덕당(觀德堂), 요무헌(耀武軒) 등이 있었다. 철옹관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머물면서 의주로 거둥하는 문제와 명나라 원군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의논한 곳이다. 1653년(효종 4)에 영변 사람인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였다는 이유로 부사를 파직하고 영변현으로 읍호(邑號)를 강등시켰다가 다시 도호부로 삼았다. 숙종 때는 전국적인 축성 사업을 벌이면서 영변부의 철옹산성을 개축하였다. 1895년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평양부영변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