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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 (월) 21:09 기준 최신판



고려시대 행정구역인 오도(五道) 양계(兩界)를 그린 지도.

개설

고려는 현종대에 이르러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 강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지방행정 제도를 개편하였다. 고려초기에는 12목을 설치하여 통치하였고,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10도로 개편하였다. 이후 현종대에 오도 양계로 개편하여 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를 활발하게 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작된 지도가 바로 「오도양계도(五道兩界圖)」로, 5도와 양계로 정비한 고려시대 지방 행정제도를 반영하고 있어, 고려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조선전기 전도(全圖)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내용 및 특징

「오도양계도」는 고려 현종대에 전국을 오도, 양계의 광역 행정구역으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9목, 15부, 128군, 332현, 29진 등으로 정비한 상황을 반영해 그린 지도이다. 오도는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 등 일반 행정구역이었고, 양계는 동계(東界), 북계(北界)로 북방 변경의 행정구역이었다. 양광도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도, 경상도는 경상남도·경상북도, 전라도는 전라남도·전라북도, 교주도는 강원도 일대, 서해도는 황해도의 일부였다. 양계는 북방의 외침을 막기 위한 변경의 군사행정 체제로, 동계는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 북계는 평안도 지역이었다.

1148년(고려 의종 2) 이심(李深)과 지지용(智之用) 등이 유공식(柳公植)의 집에 소장된 「오도양계도」를 송나라의 상인 팽인(彭寅)을 통해 송나라 재상 진회(秦檜)에게 바치게 하였다가 발각되어 처벌당한 일이 있었으며, 고려말 공민왕 때 나흥유(羅興儒)가 이 지도를 제작하여 조정에 바쳤다.

변천

조선초기 이회가 「팔도지도」를 제작할 때 고려의 「오도양계도」가 기본 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성종대에 지리지 편찬 사업을 주도하였던 양성지의 상소에 의하면, 당시에도 고려 중엽 이전 제작된 「오도양계도」가 민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13년 2월 13일).

고려시대 원본은 아니지만, 1776년(정조 즉위) 이후 채색 필사된 「고려오도양계도」가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현존한다. 이 지도의 윤곽은 정상기의 지도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조선후기 지도에 『고려사』의 지리지를 참고하여 고려시대 지명을 적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여백에 오도양계의 군현 수와 건치 연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행정구역만 적색으로 표시하였고, 중요한 강과 군현의 경계까지도 상세히 표시하였다. 백두산, 금강산, 태백산을 비롯한 명산과 철령, 죽령, 계림령 등 고개와 고원을 표시하고 특히 산의 높이와 험준함을 판별할 수 있도록 묘사하였다.

19세기 김정호가 그린 「청구도」에는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라는 색인도 4장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현종 이후의 행정구역 체계를 수록한 것으로 군현 명칭과 오도양계의 경계, 중요 하천과 고개의 명칭을 기록하여 현종 이후부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지도 위의 지명 중 춘주(春州)는 조선시대 춘천, 명주(溟州)는 강릉, 남경(南京)은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이며, 나머지는 조선시대와 동일한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부분의 군현 명칭은 글자로만 표시되어 있음에 반해 고려시대 때 세력이 컸던 군현은 특별히 사각형으로 표시하였다.

참고문헌

  • 『동국통감(東國通鑑)』
  • 『고려사(高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