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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3 판




총론

[1511년(중종 6)∼1584년(선조 17) = 74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참판(參判)이고, 증직(贈職)좌의정(左議政)이다. 자는 자온(子蘊)이고, 호는 동리(東里)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여주(驪州) 출신으로서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우정언(右正言)윤미견(尹彌堅)이고, 조부는 영월 군수(寧越郡守)윤징(尹徵)이다. 아버지는 공조 판서(判書)윤사익(尹思翼)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세걸(鄭世傑)의 딸이다.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세자빈 덕빈 윤씨(德嬪尹氏)의 아버지고, 택당(澤堂)이식(李植)의 외조부다.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고, 9년이 지나서, 1540년(중종 35)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41년(중종 36)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이어 예문관의 대교(待敎)·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는데,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1542년(중종 37) 예조 좌랑·병조 좌랑·형조 좌랑(佐郞)을 두루 역임하였고, 1543년(중종 38)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윤옥 비명」 참고.)

1545년(인종 1)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사이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중종 때부터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대립하였는데, 학문을 좋아하는 인종은 사림파(士林派)를 많이 등용하였다. 나이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그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소윤(少尹) 윤원형으로 하여금 대윤(大尹)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3명을 죽이고, 수많은 사림파의 인재를 숙청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을사사화> 때 윤옥(尹玉)의 아버지 윤사익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있으면서 대윤를 숙청하는 데에 앞장섰는데, 윤옥은 어머니 상중임에도 아버지를 도와 소윤의 이기(李芑)에게 적극 협력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7년(명종 2) 내간상(內艱喪) 3년을 끝마치고,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고 이어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겼다. 1548년(명종 3)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전라도에 나가서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명종과 문정대비에게 전라도 여러 고을의 사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그때 아버지 윤사익은 공조 판서로서 소윤의 강경파 윤원형·이기를 도와 소윤의 온건파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을 제거하는 데에 앞장섰다. 대사헌구수담이 우의정이기를 탄핵하여 이기가 위태롭게 되자, 윤옥은 이기의 심복 진복창(陳復昌)·이무강(李無疆) 등과 상의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우의정이기가 시키는대로 구수담을 논핵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특진관(特進官)윤사익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대사헌구수담이 평소에 유관을 변명한 사실을 비판하여, 구수담을 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내어, 마침내 유배지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때 소윤의 실권자 이기의 흉모 비계(凶謀秘計)가 대부분 윤옥과 진복창·이무강의 세 사람에게서 나왔다.

1549년(명종 4)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1550년(명종 5)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서,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1551년(명종 6)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거쳐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이때 문정대비가 수렴청정하였는데, 그는 승지로서 영의정이기의 밀령(密令)을 문정대비에게 비밀히 전달하고, 또 대비의 명령을 몰래 받들어 시행하여 대비의 신임을 크게 얻었다. 이것이 후일 그의 딸이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는 은총(恩寵)을 입는 계기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영의정이기가 갑자기 죽자, 그의 배경이 없어져서, 1553년(명종 8)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좌천되었다. 그 해에 그의 둘째딸 덕빈 윤씨가 태어났다. 1555년(명종 10) 아버지 공조 판서윤사익의 도움으로, 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 그는 윤원형의 신임을 얻지 못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옮겼다. 그때 아버지 윤사익이 나이가 80여 세를 넘겨서 공조 판서를 사임하고 한직(閒職)에 있었는데, 그는 바쁜 공무(公務)에도 불구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윤옥은 본래 성품이 경망하고 사나워서 화를 내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일을 당해 동료들과 의논할 때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어서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 매부 이중경(李重慶)이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李樑)과 친숙하여 윤옥도 이량 일파에 가담하였는데, 소윤 윤원형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하여 명종이 이량 일파를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1561년(명종 16) 1월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의 세자빈으로 윤원형의 사위의 고종 4촌 황씨(黃氏)를 간택하여 책봉례(冊封禮)까지 치렀으나, 이량 일파가 황씨의 몸이 약하다고 하여 파혼시키고, 그해 8월 윤옥의 둘째딸을 세자빈으로 새로 간택하였다. 그해 10월 21일 윤옥의 딸이 순회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명종실록』 참고.) 바로 윤옥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어, 조정의 요직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에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하여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 1562년(명종 17) 세자빈이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고 윤옥도 공조 참판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563년(명종 18) 순회세자가 돌아가자, 그의 딸 덕빈이 11세의 나이로 홀로 되었다. 또 그의 아버지 윤사익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65년(명종 21) 외간상(外艱喪)을 끝마치고, 다시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윤옥 비명」 참고.) 그해 문정대비가 승하하였는데, 덕빈의 가장 큰 보호자가 사라진 셈이다. 1566년(명종 21)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 6월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외직으로 쫓겨나서, 수원부사(水原府使)와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는 먼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기를 꺼려하여, 딸 덕빈 윤씨(德嬪尹氏)의 연줄을 통하여 해주 목사로 나갔는데, 사간원에서 연줄을 타고 그릇된 방법으로 본직에 임명되었다고 탄핵하였다. 그 뒤에 덕빈 윤씨는 친정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일절 외부의 청탁을 거절하여, 궁중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또 선조가 사림파의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여, <을사사화> 때 소윤에 의하여 화를 당한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신원(伸寃)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윤 윤원형·이기 등의 훈록(勳錄)을 삭탈하였다.

선조는 동궁(東宮)에서 홀로 수절하면서 비구니처럼 깨끗하게 살아가는 덕빈을 애처롭게 생각하였다. 윤옥이 해주 목사로 있을 때 옥졸들이 무고(無辜)하게 옥에 갇힌 백성을 구타하여 죽였는데, 사헌부에서 검시관(檢屍官)인 현감(縣監)과 현령(縣令)이 병사(病死)로 은폐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윤옥이 덕빈의 아버지라고 하여, 한성부 좌윤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 윤옥은 중추부 동지사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 등의 서반(西班)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즉위 이후 윤옥은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해주목사를 끝으로 돈녕부 동지사 등 한직에 머물다가, 1584년(선조 17) 2월 28일 자택에서 돌아가니, 향년 74세였다.(「윤옥 비명」 참고.)

순회세자의 세자빈 덕빈윤씨의 간택

1561년(명종 16) 10월 윤옥의 둘째딸이 순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세자빈 책봉례를 거행하고, 1562년(명종 17) 세자빈 윤씨가 덕빈으로 책봉되었다. 순회세자이부(李暊)는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로서 1557년(명종 12) 나이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세자는 원래 병약하였다. 순회세자가 나이 10여 세가 되자, 문정대비가 빨리 후사(後嗣)를 보고 싶어서 혼사를 서둘렀다. 대비의 동생 윤원형이 그 사위의 고모부 참봉황대임(黃大任)의 딸을 세자빈으로 점찍고, 은밀히 문정대비에게 고해서 세자빈으로 결정하였다. 그때 명종과 인순왕후는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어머니 문정대비의 분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씨가 몸이 약해서 1년이 넘게 혼례를 치르지 못하자, 그해 5월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 일파가 윤원형을 공격하고, 세자빈 황씨를 파혼시켰다. 당시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의 횡포를 견제하려고, 처외삼촌 이량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량 일파에 가담한 예조 참의이중경이 윤옥의 딸을 천거하여, 마침내 문정대비의 찬성을 얻어냈다. 그해 7월 좌승지에 임명된 윤옥은 다음의 왕위를 계승할 순회세자와 덕비의 혼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할 준비를 하였다.

돈녕부 동지사윤옥은 예물을 잘 갖추려고 큰 장사치 김세형(金世亨) 등에게 예물의 품목을 정하게 하고, 8도에 물건을 구하는 장사치들을 각각 2명씩, 모두 16명을 나누어 보냈다. 이들은 전국 고을의 수령들에게 윤옥의 편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예물을 교역한다고 핑계하고 특산물을 헐가로 사들였다. 단천(端川)에서 은(銀)을 무역하여 혼례에 쓸 기명(器皿)을 만들고, 6진(鎭)에서 피물(皮物)을 구해서 예물로 줄 피복(被服)을 만들었다. 또 경상도의 산은처(産銀處)·황해도의 산피처(産皮處)·평안도의 산주처(産紬處) 등지에도 장사치들이 그 포전(布錢)을 싣고 다니면서 은·가죽·비단을 교역하였다. 장사치들은 교역할 포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무명·명주를, 청홍도와 전라도에서 백저포(白苧布) 등을 거의 반값으로 싸게 교역하였다. 또 가례에 쓰일 중국 물화를 구하기 위하여 역관 홍순언(洪純彦)을 요동(遼東) 압해관(押解官)으로 삼고, 윤옥의 종자(從者)를 사신의 일행으로 보내어 중국의 사라능단(紗羅綾緞)을 무역해 오게 하였다.

장사치들이 세자빈의 혼례에 쓸 물건들을 구입한다고 핑계하고, 8도의 각 고을과 각 포구에 드나들면서 물품을 강제로 교역하였는데, 각 포구의 첨사(僉使)와 각 고을의 수령들은 기꺼이 도와주었다. 장사치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큰돈을 벌려고 덤볐다. 그 앞서 영남과 호남 지방에 기근이 들었을 때 개인 곡식을 관에 바치고 값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7백여 명이나 있었는데, 큰 장사치 김세형 등이 호조의 관리들을 매수하여 장부를 몰래 꺼내어 곡식 바친 사람들의 명단을 뽑아내서, 제용감(濟用監)의 포목(布木)을 가지고 곡식 값을 지급하면서, 곡식 1휘[斛: 한 섬 반]당 포전 2필씩으로 비싸게 계산하여, 나머지 차액을 챙겨서 무려 목면(木棉) 6백여 동(同)을 가로채서, 이것을 혼수 비용으로 사용하였으나, 대부분 장사치들이 착복하였다. 또 윤옥의 외가집 친척 큰 장사치 정희(鄭熙)와 정헌(鄭獻) 등이 혼인할 자금을 스스로 출연하였고, 친척과 지인들이 비단이나 포목을 부조하였는데, 윤옥이 자기집 창고에 금은과 비단과 포목을 쌓아 놓고, 혼수로 쓰고 남은 것을 모두 자기 재산으로 만들었다. 1562년(명종 17) 유학(幼學)이언명(李彦明)이 상언(上言)하여, 이것을 폭로하자, 명종이 전교하기를, “재상의 허물을 임금에게 고발하였으니, 그 사람의 죄가 경이 저지른 과오보다 훨씬 크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경이 재상의 신분으로서 불미스러운 말을 듣게 되었으니, 경계하고 삼가서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1580년(선조 13) 8월 윤옥이 모리배들과 결탁하여 양남(兩南)에서 곡식을 바친 7백여 명의 명단을 뽑아내어, 호조에서 면포(綿布) 6백여 동(同)을 가로챈 사실을 알고, 곡식을 바친 본주(本主)들이 들고 일어나서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만년에 윤옥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성품과 일화

윤옥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유약하고 조급하였으나 행동은 근면하고 간결하며, 머리가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그가 젊어서 아버지를 도와 소윤의 책사(策士)로 활동하다가, 중년에 이량 일파가 되어,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덕빈이 되도록 하였다. 사림파의 사관(史官)들이 그를 비난하기를, “윤옥은 성격이 음험하고 사특하며 남에게 붙좇기를 잘하여, 아버지를 꾀어서 권간(權奸) 이귀(李貴)에게 아첨하게 하여 사림파로 하여금 화를 당하게 했으니, 이를 듣는 자들은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였고,(『명종실록』참고.) 또 비평하기를, “평상시에는 유약하고 공순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에는 경솔하고 조급하여,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하였다.(『명종실록』참고.)

1552년(명종 7) 윤옥이 좌부승지로 있을 때 황해도 지방에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이 출몰하여 관군을 괴롭혔다. 임꺽정 일당이 장단(長湍)·적성(積城)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황해도 지방을 횡행하면서 관군을 괴롭혔으므로, 사헌부에서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이 두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보내서 도적떼를 잡도록 하라고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전조(銓曹)에서 조안국(趙安國)을 장단 부사로 임명하였는데, 조안국은 김안로(金安老)의 가신(家臣) 조현범(趙賢範)의 아들로서 성품이 본래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해 1월 조안국이 배사(拜辭)하던 날 아침에 일찍이 승정원에 와서 승지윤옥을 불러내어, “의정부 3공(公)의 뜻으로 도적떼를 잡는 계책을 대비에게 바로 아뢰려는 것입니다.” 하면서, 봉서(封書) 한 통을 주고, “부디 다른 승지에게 알리지 말고 모름지기 비밀히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당시 영의정이기가 조안국에게 도적떼를 잡을 계책을 세워서 좌부승지윤옥에게 비밀히 주어서, 대비에게 남모르게 아뢰어 대비를 안심시키도록 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윤옥이 그 봉서를 가지고 청지기(廳直)에게 가서 승전색(承傳色)을 청하였는데, 동료 승지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물으니, 윤옥이 대답하기를, “의정부 3공이 조안국으로 하여금 나에게 말하여 비밀히 대비에게 아뢰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조안국을 불러서 함께 대비에게 가서 아뢰자고 하였다. 동료 승지들이 깜짝 놀라서 만류하기를, “조안국은 2품 재상(宰相)이 아니다. 3품 당상관(堂上官)은 직계(直啓)할 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수령(守令)이 된 자는 결단코 입청(入廳)하여 아뢸 수 없다.” 하였으므로 조안국은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물러나왔다. 그리하여 윤옥이 단독으로 봉서를 가지고 들어가서 대비에게 아뢰기를, “이 일은 의정부 3공이 조안국으로 하여금 소신(小臣)에게 말하여 비밀히 입계(入啓)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다른 승지는 모릅니다.”고 하였다. 이처럼 승지윤옥은 영의정이기의 밀령을 문정 대비에게 전하고, 또 대비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였으므로, 대비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동료 승지들이 좌부승지윤옥에게 따지기를, “의정부 3공이 비록 비밀히 아뢰라고 하였더라도 어찌 승지와 사관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사체(事體)에 있어서 미안(未安)할 뿐만 아니라, 또한 뒷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윤옥이 벌컥 화를 내면서, “내가 조안국의 말만을 듣고 비밀히 아뢰었다고 여기는가? 일이 매우 왜곡되었다.” 하고, 또 “뒷날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나를 추문(推問)하여 파직시키라.” 하니, 동료들이 난처하여 이를 만류하였을 뿐이었다. 사알(司謁)이 윤옥에게 “입계한 봉서를 도로 내렸는가?”고 물으니, 윤옥이 귓속말로 이르기를, “대비에게 계하(啓下)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하였다. 문정 대비는 끝내 봉서를 내려주지 않아서 다른 승지들은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도적을 잡는 일은 곧 형방 승지(刑房承旨)인 우부승지의 소관인데, 윤옥은 병방 승지(兵房承旨)인 좌부승지로서 이를 맡아서 대비에게 아뢰었으므로, 일을 처리하는 체계를 무너뜨린 것도 너무 심하였다.(『명종실록』 참고.)

그러나 윤옥은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그가 양주목사와 부평 부사로 나가서 따로 거처할 때 공무가 항상 바쁜 중에도 혼정신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 예(禮)를 다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였다. 벼슬살이 할 때에는 청렴하고 근면한 자세로 일관하고, 세속에서 좋아하는 오락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항상 책을 탐독하고 학문을 즐겨서, 낮이나 밤이나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으며, 남에게 배운 바를 후진(後進)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니, 그에게 배우려고 책을 싸서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윤옥 비명」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파곡(坡谷)이성중(李誠中)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순회세자의 세자빈 덕빈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특별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증조할머니는 세종 때 명신 좌의정문경공(文敬公)허조(許稠)의 막내딸이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상의원(尙衣院)직장(直長)윤봉종(尹奉宗)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직장윤백순(尹百順)이다. 장녀는 유학 구사열(具思說)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홀로 되었다. 차녀는 1561년(명종 16) 나이 9세 때 순회세자이부에게 시집가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562년(명종 17) 나이 10세 때 덕빈으로 책봉되었다. 1563년(명종 18) 덕빈 윤씨는 나이 11세 때 순회세자가 돌아가서 홀로 되었고, 시호가 공회빈(恭懷嬪)이다. 3녀는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안성(李安性)에게 시집갔는데, 예조 판서이식의 어머니다. 그의 외손자 택당이식은 상촌(象村)신흠(申欽),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 계곡(谿谷)장유(張維)와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文章家) 중 한 사람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선고(淸選考)』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택당집(澤堂集)』
  • 『무릉잡고(武陵雜稿)』
  • 『퇴계집(退溪集)』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오음유고(梧陰遺稿)』
  • 『사류재집(四留齋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소암집(疎菴集)』
  • 『미호집(渼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