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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0 판




총론

[1573년(선조6)∼1645년(인조23) = 73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서성(徐渻)이고,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목사(牧使)송녕(宋寧)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친형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1년(선조3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03년(선조36)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1605년(선조38)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고, 공조 ·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1607년(선조40)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정랑으로 옮겼고, 1608년(선조41)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609년(광해군1)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는데, 이때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 기주관(記註官)에 임명되어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고, 7년 뒤인 1616년(광해군8)에 완성하였다. 1610년(광해군2) 홍문관에 들어가서 수찬(修撰) · 교리(校理)로 승진하였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옮겼고, 1612년(광해군4) 장악원(掌樂院)정(正)을 거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갔다. 1613년(광해군5)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소북(小北)유영경(柳永慶) 일파를 몰아내고,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였다. 그의 아버지 충숙공(忠肅公)서성은 일찍이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7신(臣)’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고, 그 동생 달성위 서경주의 사위가 김제남의 아들이어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그도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궁핍하게 살면서 10여 년 동안 칩거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하는 중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아버지가 귀양지에서 풀려나서 복관되었고, 그의 형제는 상중에 있다가,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3년 상을 끝마치고 1625년(인조3)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좌부승지 · 우승지로 승진되었다. 1626년(인조4)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1629년(인조7) 용양위(龍驤衛) 행(行) 부호군(副護軍) · 행 호조 좌랑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9)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상례를 끝마치고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635년(인조13) 태묘(太廟)부묘(祔廟)하는 예(禮)를 도왔기 때문에 승품(陞品)되고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1636년(인조14)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 군사가 도성(都城)을 침략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사헌부 · 사간원의 양사(兩司) 장관(長官)이 되었다.

이때 조정의 의론이 김상헌(金尙憲)의 주전파(主戰派)와 최명길(崔鳴吉)의 주화파(主和派)로 나누어 시끄럽게 싸우고 있었으므로, 조정에 머물 뜻이 없어서 자원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서북 지방의 변경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여러 재상과 함께 후금의 심양성(瀋陽城)으로 급히 달려가서 양국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였다. 1638년(인조16) 도승지에 발탁되어 김상헌의 무죄를 상소하였으나, 인조가 좌부승지로 하여금 봉입(封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대사성 · 대사간을 거쳐 1643년(인조21)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기영회(耆英會: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에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와서, 1644년(인조22)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1645년(인조23) 늘고 병들었다 하여 여덟 번이나 사직하는 글을 올렸다. 병이 심해지자, 인조는 그를 우의정의 기무(機務)에서 풀어주고 바로 중추부 판사로 임명하였다. 1645년 2월 29일 관사(館舍)에서 죽으니,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서경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평소에 신중하고 엄격하여 실수하는 일이 적었다. 그는 일부러 안색을 좋게 해서 남과 사귀는 일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의 과실(過失)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로자(當路者)가 그를 끌어 주지도 않았고, 그 역시 공명(功名)을 얻는 데 뜻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년에 인조의 지우(知遇)를 얻어 임금의 총애를 크게 받았어도 그는 더욱 겸손하였고 스스로 잘난 체 하지 않았다.

1644년(인조22) 서경우가 늙어서 우의정에 임명될 때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때 정승 자리 결원이 있었는데, 정경(正卿) 중에는 복상(卜相)에 추천될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묘당(廟堂: 의정부)에서는 아경(亞卿) 중에서 뽑아서 승진시키기를 청하자, 인조가 허락하였다. 이에 3망(望: 후보자) 중에 부제학(副提學)이목(李楘)을 수망(首望)으로 하고, 형조 판서서경우를 부망(副望)으로 올렸는데, 인조가 서경우를 낙점(落點)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영평(永平) 서쪽 금화봉(金華峰)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그의 양손(養孫) 서문중(徐文重)이 지은 묘지(墓誌)가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창녕성씨는 사과(司果)성희순(成希舜)의 딸인데 포천의 선영에 따로 무덤이 있고, 둘째 부인 창녕성씨는 중추부 지사성염(成恬)의 딸인데 그의 무덤 왼쪽에 묻혔다.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함경도 감사(監司)를 지냈으나 후사가 없어서, 종제(從弟)인 서정리(徐貞履)의 아들 서문중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산기정(薊山紀程)』
  •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
  • 『심전고(心田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원직지(燕轅直指)』
  • 『연행일기(燕行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조경일록(朝京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