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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1397년(태조 6)에 정도전, 조준 등이 육전(六典)의 형식을 갖추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법전.

개설

이 책은 1397년(태조 6)에 정도전, 조준 등이 육전(六典)의 형식을 갖추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법전이며, 『경국대전』 이전의 기본 법전이었으나, 오늘날은 전하지 않는다. ‘속육전(續六典)’은 '경제육전(六典)의 속편(續編)'으로 『경제육전』이 편찬된 뒤에 나온 『원육전(元六典)』, 곧 『속육전(續六典)』이 나온 뒤 '원래(元)의 육전(六典)'이란 뜻으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이르는 말이다.

편찬/발간 경위

『경제육전』을 시행한 뒤에 새로운 법령이 쌓이므로, 이를 법전으로 만들기 위하여, 1407년(태종 7) 8월에 속육전수찬소(續六典修撰所)를 설치하여, 하륜(河崙)과 이직(李稷) 등이 1412년 4월에 『경제육전속집상절(經濟六典續集詳節)』을 편찬하고, 이를 수정한 뒤에 1413년 2월에 『속육전』으로 공포, 시행하였다. 이 『속육전』에는 1398년(태조 7)부터 1410년경까지의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것들이 실려 있다. 1420년(세종 2)에는 조선 건국 후의 법령 중, 법전에 누락된 것을 추가하고, 중복ㆍ착오된 것을 바로잡으며, 『속육전』 이후의 법령을 추가하여, 새로운 『속육전』을 편찬하자는 의견이 있어, 1422년 8월에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이직ㆍ이원(李原)ㆍ맹사성(孟思誠)ㆍ허조(許稠) 등이 편찬 작업을 수행하여, 1426년 12월 『원ㆍ속육전(元ㆍ續六典)』과 『등록(謄錄)』을 찬진하고, 다시 개수를 거쳐서, 1428년 11월에 『신속육전(新續六典)』 5권과 등록 1권을 완성하여, 이듬해 3월에 인반(印頒)하게 하였다. 이 때 편찬한 등록을 『육전등록(六典謄錄)』이라고 한다. 『신속육전』이 시행된 뒤에도 세종은 법전 중에서 의문점을 신하와 같이 검토하고, 경연관과 함께 강론하였으며, 집현전 유생들에게도 개정할 점을 지적하는 ‘육전진강서(六典進講書)’를 제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황희(黃喜)로 하여금 이를 검토하게 하여, 1433년 정월에 새 법전을 완성하여, 『신찬경제속육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등록』과 함께 3월에 인쇄하였다. 그러나 30여 개 조문이 누락되었음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를 별도로 인쇄하여 『속육전』의 말미에 첨가하였다.

구성/내용

조선시대 통일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공포한 뒤 태종 때의 『경제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 세종 때의 『신속육전(新續六典)』과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을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인 『속육전』은, 조선 초기 『경제육전』 이후 법치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세조대 이후에는 수교집 체제를 탈피한 『경국대전』 편찬으로 계승된다. 불행히도 현재 『경제육전』과 『속육전』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 조문의 일부가 『조선왕조실록』에 여기저기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들 조문들을 모아 『경제육전』을 복원한 것이 여러 종류가 있다. 또한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이 편찬된 후에 이를 개정한 『경제육전속집상절(經濟六典續集詳節)』ㆍ『신속육전(新續六典)』ㆍ『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등을 통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1407년(태종 7) 8월 ‘속육전편찬소’를 설치하고, 하륜(河崙)을 책임자로 하여 착수하여, 13년 2월 간행 반포된 『경제육전속집상절』은 태조 7년에서 태종 7년까지의 수교(受敎)를 모은 것으로 체제는 원전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으나, 이두(吏讀)는 모두 순한문으로 고쳤다.

『신속육전』은 1422년(세종 4)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이직(李稷)ㆍ이원(李原)ㆍ맹사성(孟思誠)ㆍ허조(許稠) 등을 책임자로 하여, 개찬작업에 들어가, 1426년 12월 간행 반포되었다. 서문에 따르면, 여기서는 태종 후반기부터 논란이 되었던 신구 법령 간에 어긋나는 내용을 조정하여, 법전내용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체제문제를 배려하여, 수교를 원문 그대로 싣는 방식에서 중복되는 수교는 합하는 등, 조문을 다듬고, 분류방식에서도 연월을 배제하고, 항목별 분류를 강화하고, 이를 일일이 주(註)로 밝혔다. 조례(條例)를 모아 만든 법전으로 1429년(세종 11) 이직(李稷)이 개편하였고, 다시 1433년 황희(黃喜)가 『속육전』 6권, 『등록(謄錄)』 6권으로 찬진(撰進)하였으나,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이 때부터 만세의 법은 법전으로, 일시적인 법은 『등록(謄錄)』에 수록한다는 구분이 생겨, 『육전등록』을 따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신속육전』이 완성된 뒤에도 이에 대한 이의가 그치지 않아, 곧 재편찬 작업이 시작되다가, 1433년 1월 황희(黃喜)에 의해 정전(正典) 6권과 등록 6권이 찬진됨으로써, 『신찬경제속육전』이 완성되었다.

세종실록 59권에 보면, 1433년(세종 15년) 1월 4일에 상정소 도제조(詳定所都提調)황희(黃喜) 등이 새로 편찬한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을 올렸다고 한다. 그 전(箋)에 이르기를, “그윽이 듣건대, 옛 제왕(帝王)이 천하의 국가를 다스릴 적에 모두 글을 만들어서, 당시의 전장법도(典章法度)를 기록하여, 한 시대의 제도로 삼았습니다. 이전삼모(二典三謀)는 당(唐)ㆍ우(虞)의 법이요, 주관(周官)ㆍ주례(周禮)는 성주(成周)의 법이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성덕(聖德)이 운수(運數)에 응하사, 집을 화(化)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상신(相臣) 조준(趙浚) 등이 교조(敎條)를 모아서, 이름을 ‘경제육전’이라 하고, 간행(刊行)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이 법을 지켰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 때에는 정승 하윤(河崙) 등이 『속전(續典)』을 편찬하였으며, 우리 주상 전하께서 위(位)를 이음에 미쳐 의정(議政) 이직(李稷) 등이 하윤의 편찬한 바를 이어서, 구문(舊文)을 수정(修正)하여 올리자, 이미 성상께서 열람하심을 더하시어, 오히려 미진(未盡)함이 있다 하시고, 신 등에게 명하여, 다시 찾고 검토하기를 더하게 하시기로, 하윤ㆍ이직 등의 글과 이서(二書)에 실리지 아니한 영갑조건(令甲條件)을 가지고, 자세히 채택(採擇)을 더하여, 그 중복된 것은 버리고 번잡한 것은 깎았는데, 그 버리고 취함은 일체 재결을 받고, 좋은 것을 모아서 책을 이루어, 『정전(正典)』 여섯 권을 만들고, 또 일시에만 소용되고, 오래도록 경과하지 아니한 법을 골라서, 별도로 『등록(謄錄)』 여섯 권을 만들어 정사하여 올리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중외에 반포하여 자손 만대(子孫萬代)로 하여금 지키는 바가 있게 하오면, 실로 종묘 사직의 무궁한 아름다운 일이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하기를 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김용덕, 『한국제도사연구』, 일조각, 1990.
  • 김형승, 「조선왕조의 입법과정에 관한 연구」, 연구보고서, 법제처, 1969
  • 박병호, 『근세의 법과 법사상』, 도서출판 진원, 1997.
  • 서일교, 『조선왕조형사제도의 연구』, 한국법령편찬회. 1968.
  • 윤재수, 「법전편찬의 연혁」, 연구보고서, 법제처, 1966.
  • 지철호, 「조선전기의 유형」, 『한국법사학』 제5호, 한국법사학회,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