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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조선 중기 유희춘(柳希春)이 1570년(선조3) 어명을 받아,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 등 사현(四賢)의 행적을 모아 엮은 책.

개설

이 책은 선조가 즉위해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추장(推奬)하고, 그들의 도학과 지치정치(至治政治)를 본받기 위해, 그 행적과 문헌을 모으게 해 편집된 것이다. 유희춘이 유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한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을 모방해, 정몽주(鄭夢周) 이후로 성리학에 정진한 사현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김굉필의 문헌은 주로 『경현록(景賢錄)』에서 뽑았고, 이언적에 관한 내용은 『회재집(晦齋集)』에서 추출하였다. 정여창과 조광조의 것은 견문을 수집하거나, 『경연일기(經筵日記)』에서 수집해 편집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선조가 즉위하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추장(推奬)하고, 그들의 도학과 지치정치(至治定則)를 본받고자 하여, 그 행적과 문헌을 모으게 해 편집된 것이다. 유희춘이 오도(吾道 : 유학)를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한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을 모방하여, 정몽주(鄭夢周) 이후로 성리학에 정진한 사현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김굉필의 문헌은 주로 『경현록(景賢錄)』에서 뽑았고, 이언적에 관한 내용은 『회재집(晦齋集)』에서 추출하였다. 정여창과 조광조의 것은 견문을 수집하거나 『경연일기(經筵日記)』에서 수집하여 편집하였다.

서지 사항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을해자본(乙亥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29.8cm, 가로 20.1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은 김굉필 편으로 행장ㆍ서술ㆍ유사ㆍ소ㆍ제문ㆍ부ㆍ시, 권2는 정여창 편으로 행장ㆍ유사ㆍ명설(名說)ㆍ소, 권3은 조광조 편으로 행장ㆍ상소문ㆍ춘부(春賦)ㆍ잠ㆍ묘갈명ㆍ시ㆍ경연진술(經筵陳述), 권4는 이언적 상편으로 행장ㆍ잠ㆍ십조소편(十條疏篇), 권5는 이언적 하편으로 서(書)ㆍ진수팔규(進修八規) 등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다.

김굉필의 소에서는 도학을 위해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여창이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후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올린 사직소의 내용을 실었다. 조광조의 경연진술에서는 지치(至治)와 도체(道體)를 설명하고 제왕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역설해, 유교의 도학정치의 이상을 토대로 하는 정치관을 피력하였다.

이언적의 십조소에서는 조정의 간신배를 멀리하고, 시폐(時弊)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진수팔규에서는 임금의 할 도리로서 명도리(明道理)ㆍ입대본(立大本)ㆍ체천덕(體天德)ㆍ법왕성(法往聖)ㆍ광총명(廣聰明)ㆍ시인정(施仁政)ㆍ순천심(順天心)ㆍ치중화(致中和)ㆍ양국본(養國本) 등 수신ㆍ치국의 기본을 밝혀, 이언적의 정치관과 도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첫째, 조광조의 경연진설(經筵陳說), 이언적의 십조소(十條疏), 진수팔규(進修八規) 등을 수록하였다. 이를 통해 『국조유선록』이 특별히 통치자의 내적 수양과 도덕적 실천의 중요성을 주요한 문제의식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국조유선록』은 당시 의견이 분분하였던 이언적의 문헌을 수록하였다. 이를 통해 『국조유선록』이 주로 정치 영역에서만 논의되었던 이전 시기 도통론과 문묘종사에 관한 논쟁을 보다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지평으로 확장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책머리에 김천 구성면에 위치한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배향된 청련이후백(李後白)의 다음과 같은 서문이 실려 있어, 이 책의 간행의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명나라의 융경 경오년(1570)은 곧 우리나라 전하[선조]께서 왕위를 이어 받은 지 3년이 되는 해이다. 이 때 상감께서 밤낮으로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시어,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시어 성리의 학문에 유의하셨다. 하루는 저녁 강론이 끝난 뒤에 상감께서 부제학유희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언적의 문집은 내가 이미 보았다. 그러나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는 모두 세상에 흔히 나타나지 않는 어진 사람들인데 저술한 책이 없겠는가? 그대가 나를 위해서 그 지은 글을 수집해 오라.’라고 하셨다. 유희춘이 명을 받고, 두렵고 황공하여 물러나와, 홍문관의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이 분들의 남긴 글을 주워 모아서, 분류를 하고 또 아울러 그들의 행적과 일을 수록하여,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을 모방하여, 목차와 조항을 만들어, 다시 임금님의 재가를 얻어 이를 확정시켰다. 김굉필의 글에 있어서는 경현록에 약간의 가감을 하였고, 이언적의 글은 자못 많아서 다 수록할 수가 없어, 그  긴요한 곳만 골라서 열거하고, 그 밖에는 많이 듣고 본 바에 의해서 수록하였다. 책이 다 이루어져 이를 임금님께 진상하여,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라 이름을 짓기를 청하였다. 상감께서는 이를 윤허하시고, 깊이 살피시어 교서관에 내려서, 인쇄하여 나라 안에 반포케 하시고, 또 신에게 명하시어 서문을 쓰게 하셨다.(중략)

송의 이종황제가 능히 주염계ㆍ정횡거ㆍ정이천ㆍ주회암 등을 숭배하여 등용하고, 그 서책을 숭상하였으나, 진덕수와 위료옹은 마침내 쫒겨남을 면하지 모사였고, 간신들이 정치를 주름잡아 국가의 운세가 쇠퇴하였다. 이는 원래 논할 바가 못 되는 일이고, 잠시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보면, 성철하신 인군이 위에 계셨기에 정몽주의 사당이 이미 승격되었고, 김굉필ㆍ정여창의 관작이 이미 높아졌으나, 당대에는 음험하고 사악한 무리가 뜻을 얻어, 사건이 차마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전하께서 네 신하에게 처우하심과 또 그 학문과 덕을 숭상 장려하심이 특별히 다르신 것은 가히 성의를 다하신 일이라 할 만하다. 후세에서 오늘의 우리 세상을 보는 것이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전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원하옵건대, 성명하신 전하께서는 이를 마음에 두시고, 정성을 좋아하시는 마음을 충족하셔서 맡으신 일에 성심을 다하실 것 같으면 우리 유도의 큰 다행이며, 또한 국가의 복도 길이 영원할 것이다.”

참고문헌

  • 우정임, 「『미암일기』를 통해 본 유희춘의 서적교류와 지방판본의 유통」, 『지역과 역사』 제26호, 부경역사연구소, 2010.
  • 임명희, 「『국조유선록』에 나타난 선조대 사림파의 도통 인식과 관념의 변화」, 『민족문화논총』 60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5.
  • 최한선, 「영호남 사림과 금남(錦南) 최부(崔溥)」, 『한국고시가문화연구』 제27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