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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8 기준 최신판



중국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에 걸쳐 활약했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

개설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중국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에 걸쳐 활약했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로 원명은 ‘고금역대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이다. 원간본은 2권이었다. 명나라 진은(陳殷)의 음석본(音釋本)은 7권으로 되어 있다. 18사의 서적을 약기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아울러 한문을 익히기 위하여 조선 초기부터 학동들에게 읽혀졌다.

『십팔사략』은 사기ㆍ한서ㆍ후한서ㆍ삼국지ㆍ진서(晉書)ㆍ송서ㆍ남제서ㆍ양서ㆍ진서(陳書)ㆍ후위서ㆍ북제서ㆍ후주서(後周書)ㆍ수서ㆍ남사ㆍ북사ㆍ당서ㆍ오대사ㆍ송감 등의 중국의 정사 18종 가운데에 풍교(風敎)에 관계가 있는 말을 가려 뽑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천황씨(天皇氏)로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1403년(태종 3)에 명나라 태감 황엄(黃嚴)이 관복과 비단, 그리고 『원사(元史)』 등과 더불어 『십팔사략』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허균(許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증선지의 『사략』이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성현(成俔)이 매우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전래 초기단계에서부터 사대부들의 애호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옹지소록」에는 김수(金晬)가 어릴 때부터 『사략』을 좋아하여, 공부가 매우 깊었는데, 뒤에 선조의 명을 받아 이를 교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는 “선조가 사저시절에 『사략』을 의원 양인수(楊仁壽)에게서 배웠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 매우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천황(天皇)ㆍ지황(地皇)이 각각 1만 8000세를 지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략』의 내용을 증거로 원용하고 있다.

서지사항

7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5.5cm, 가로 17.5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사기(史記)』ㆍ『한서(漢書)』에서 시작하여,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이르는 17종의 정사(正史), 송대(宋代)의 『속송편년자치통감(續宋編年資治通鑑)』ㆍ『속송중흥편년자치통감(續宋中興編年資治通鑑)』 등 사료(史料)를 첨가한 십팔사(十八史)의 사료 중에서, 태고(太古) 때부터 송나라 말까지의 사실(史實)을 발서(拔書)하여 초학자를 위한 초보적 역사교과서로 편찬한 것이다.

원서(原書)는 2권이었으나, 명(明)나라 초기에 진은(陳殷)이 음과 해석을 달아, 7권으로 만들고, 유염(劉剡)이 보주(補注)를 가하여, 간행한 것이 현행본이다. 사실의 취사선택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고, 사료적 가치가 없는 통속본이지만, 중국왕조의 흥망을 알 수 있고, 많은 인물의 약전(略傳)ㆍ고사(故事)ㆍ금언(金言) 등이 포함되어 있다.

18종의 역사서는, ①『사기(事記)』, ②『한서(漢書)』, ③『후한서(後漢書)』, ④『삼국지(三國志)』, ⑤『진서(晋書)』, ⑥『송서(宋書)』, ⑦『남제서(南齊書)』, ⑧ 『양서(梁書)』, ⑨『진서(陳書)』, ⑩『후위서(後魏書)』, ⑪『북제서(北濟書)』, ⑫『후주서(後周書)』, ⑬『수서(隨書)』, ⑭『남사(南史)』, ⑮ 『북사(北史)』, ⑯『당서(唐書)』, ⑰『오대사(五代史)』, ⑱『송사(宋史)』 등이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는 1678년(숙종 4) 중국의 부칙시위(副勅侍衛) 갈(喝)이 와서, 『석주집(石洲集)』ㆍ『읍취헌집(挹翠軒集)』 등의 우리나라의 문적을 비롯하여, 여러 책들을 가져갔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에 『십팔사략』과 『고문진보(古文眞寶)』가 들어 있었다고 하였다.

『사략』의 글은 초입부에 허황된 내용이 많다. 그리고 지나치게 축약이 심하여, 문리가 통창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에서 “『통감(通鑑)』이나 『사략』은 우리나라에서는 숭상하지만, 중국에서는 숭상하는 일이 없다.”고 하여, 이것이 훌륭한 교재가 아님을 말하였다.

조위한(趙緯韓)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이 중국과 같은 수준이 될까 걱정하여, 『사략』과 『고문진보』를 우리나라에 보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문장이 점차 낮아져 옛날에 미치지 못하니, 한스럽다고 하였다. 그는 『사략』과 『고문진보』의 해독성을 심각하게 비판하였다.

홍한주(洪翰周)는 『지수염필(智叟拈筆)』에서 『사략』이 국초부터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와 함께 궁중에 널리 읽혀졌고, 그래서 자신도 어렸을 때에 이것을 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청나라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에도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자신은 이것을 좋은 책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략』은 온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사략』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공과가 뒤섞여 일방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초학의 학습서로서, 우리 문화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민관동, 「『삼국연의』에 묘사된 고사성어 연구」, 『국어문논역총간』 제26집, 중국어문논역학회, 2010.
  • 장기근,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인간학(人間學)」, 『광장』 206호, 세계평화교수협의회, 1997.
  • 한국공업표준협회, 「십팔사략의 리이더」, 『월간 품질경영』 15호, 한국표준협회,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