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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7 기준 최신판



1485년(성종 16)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고,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책.

개설

『동국통감(東國通鑑)』은 1485년(성종 16)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고,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이다.

이 책은 편년체로 구성되었으며, 단군조선으로부터 삼한까지는 책머리에 외기(外紀)로 다루었고, 삼국의 건국부터 669년(신라 문무왕 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935년(고려 태조 18)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까닭은 자료가 부족하여, 체계적인 서술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또 신라기를 독립시킨 까닭은 신라통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삼국 중 특정한 나라, 즉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우지는 않았고,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연대표기에 있어서도, 『동국사략』의 서술방식인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과 달리 삼국 당시의 제도를 따라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삼국의 연기는 연호로 표기하지 않았고, 중국과 삼국의 연기를 아울러 썼다. 범례는 『자치통감』에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은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체제를 절충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본래 이 책을 편찬할 때 세조가 의도했던 바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이 책은 1474년(성종 5)에 영의정신숙주(申叔舟)가 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신숙주가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죽게 되자, 노사신(盧思愼)이 주축이 되어 서거정ㆍ이파(李坡)ㆍ김계창(金季昌)ㆍ최숙정(崔淑精) 등의 도움을 얻어 완성하였다. 고대사 부분은 1476년(성종 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고, 『동국통감』은 1484년(성종 15)에 완성되었다. 이듬해에는 완성된 책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동국통감』 56권을 새로 편찬하였다.

서지 사항

56권 3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6.7cm, 가로 18.4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이 실려 있다. 그중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써놓은 것이다. 찬자들이 쓴 204편의 사론 중 절반이 넘는 118편이 최부(崔溥)가 쓴 것이다. 사론의 대부분은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관련된 것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事大名分)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다음으로 강상윤리(綱常倫理)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아 이를 잘 지킨 사람은 사람을 칭송하였으며, 군신ㆍ부자ㆍ남녀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현실적으로 성종과 사림(士林)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공리(功利)를 배격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아 종래의 인물에 대해 지절(志節)과 업적을 구별하여 평가했으며 문무를 차별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삼국사절요』는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의 연결을 의식하고 편찬한 듯하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ㆍ『수이전』ㆍ『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이용하려던 고기류(古記類)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수사관(修史官)이 완성한 것이지만, 세조 자신이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보다 고대문화를 훨씬 포용하고 있다. 이는 처음으로 삼국의 세력이 대등하다는 입장이 표방되어,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을 수정했다는 것과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 넣지 않음으로써, 고대문화에 대한 비판을 완화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정치적 차원에서 아직 정통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을 주류로 정립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 사림이 참여함으로써,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반영되었다. 사림의 성리학적 명분주의는 성종의 왕권 안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강상의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세조와 그 훈신(勳臣)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았다. 이 책은 조선 전기 대표적 관찬사서(官撰史書)의 하나로 꼽힌다.

1484년(성종 15)에 노사신(盧思愼)ㆍ서거정의 주도로 찬진된 『동국통감』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찬자들이 모두 훈신이었던 성향으로 보나, 찬자 자신들이 사론을 써넣지 않은 점으로 보나,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있던 사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지금 전해지는 1485년에 개찬된 『동국통감』은 성종 자신이 적극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 사림이 참여해,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투영된 사서가 되었다. 따라서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해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직접적으로는 세조 및 그를 보좌했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를 가지며, 간접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세조와 훈신을 비판해온 재야 사림세력의 처지를 강화해 주는 기능을 가진다고 하겠다. 동시에 훈신의 압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편찬은 형식상으로는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공동 합작으로 편찬되어, 지금까지 모아지지 못했던 대립적인 요소가 합일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초기 역사 서술에서 완성의 의미를 지닌 것도 사실이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편,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 남지대, 「조선전기의 역사의식」, 『한국사상사대계』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역. 『국역 동국통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
  • 정구복, 「삼국사절요에 대한 사학사적 고찰」, 『역사교육』 18, 역사교육학회, 1975.
  • 한영우, 『조선전기사학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