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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5 기준 최신판




19세기 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선교사로, 조선 교구신부.

개설

최진승은 드게뜨(Victor Marie Deguette)의 한자식 표기이다. 드게뜨는 노르망디의 망슈 지방 모르텡(Mortain)에 위치한 블랑쉬 수도회(Abbaye Blanche)에서 학업을 시작하였으며, 쿠탕스(Coutances) 교구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72년 5월 25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74년까지 프랑스 내에서 교구신부를 역임한 뒤 1875년 1월에 파리외방전교회에게 들어갔다. 1년간의 수련 생활을 마친 뒤 1876년 2월 27일에 조선으로 파견되었으며, 그해 5월 10일에 비밀리에 서울에 들어갔다. 1878년 9월에 조선 정부의 추방령에 따라서 드게뜨는 청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나가사키를 거쳐서 1883년에 다시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그 후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에 전념하다가 1889년 4월 29일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876년 2월 27일에 만주에 도착한 드게뜨는 그곳에서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리델([李福明], Félix-Clair Ridel) 주교를 만났다. 리델 주교를 만난 다음 날, 드게뜨는 곧장 리델 주교 및 블랑([白圭三], Jean Marie Gustave Blanc) 신부와 함께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을 받아서 조선으로 입국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3명의 신부가 한꺼번에 조선에 입국하는 것이 어렵다는 조선인의 충고에 따라서 리델 주교는 중국에 남고, 드게뜨와 블랑만이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5월 10일에 서울 인근에 도착하자마자 드게뜨는 병을 앓았으며, 1877년에 그는 용인에 거처를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 관헌에서 드게뜨의 거처를 파악하자, 그는 충청도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며, 1878년 초에 리델 주교 또한 조선 관헌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조선 정부가 리델 주교를 청국으로 추방시키는 조치를 취하자, 드게뜨는 은거지에서 나와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79년 5월 16일에 공주에서 조선 관헌에 체포되었다(『고종실록』 16년 4월 11일). 그러자 주청 프랑스공사는 이홍장에게 드게뜨의 석방을 요청하였고, 이에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드게뜨의 석방을 권유하는 서신을 발송하였다[『고종실록』 7월 9일 1번째기사 ]. 청국 총리아문에서도 예부를 통해서 조선 정부에 자문을 보냈는데, 자문에는 조선 정부가 드게뜨를 구금한 이유를 청국 측에 알리고, 그의 즉각적인 석방과 청국으로 귀환을 단행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종실록』 8월 16일 1번째기사]. 결국 1879년 9월에 조선 정부는 드게뜨를 석방하고, 청국으로 추방시켰다(『고종실록』 16년 8월 29일).

드게뜨는 만주에서 리델 주교와 한라자전(韓羅字典) 편찬에 착수하였으며, 1881년에는 일본장기(長崎)로 건너가서 조선에서 선교에 필요한 서적을 인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883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비준으로 조선 내에서 종교 활동이 가능해지자, 드게뜨는 블랑 주교의 요청으로 다시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1889년까지 주로 이천과 원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의 선교에 주력하였다. 1889년 4월에 서울로 올라온 드게뜨는 장티푸스로 인해서 4월 29일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Relation de la captivité et de la délivrance de M. Deguett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missionnaire apostolique en Corée, l’oeuvre de Saint-Paul, 1880.

묘소

서울교구 성직자 묘지(서울 용산성당 소재).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