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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의 명나라 장수.

개설

주문욱은 명나라 무장으로 공유덕(孔有德) 등의 반란군이 후금에 항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후금을 막기 위해서 무력으로라도 조선을 그들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공유덕 등을 압록강까지 뒤쫓아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1621년부터 요동 수복을 표방한 모문룡(毛文龍)은 명나라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가도와 철산에 주둔하였다. 주문욱은 모문룡이 거느린 군사의 존재가 조선이 명을 배반하여 후금으로 기울어지지 못하게 하는 견제 수단이라 이해하였다. 그는 조선을 무력으로라도 통제하여 명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모문룡이 원숭환(袁崇煥)에 의하여 살해당한 1629년 6월 이후, 그 휘하에 있던 공유덕 등이 1632년 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에 의한 등주 함락은 명에 큰 타격을 입혔는데, 등주성에는 홍이포(紅夷砲)를 비롯한 많은 무기들이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명 정부가 토벌하기 위하여 70,000의 대병력을 동원하자, 공유덕 등은 이들을 피해 광록도(廣鹿島)·장산도(長山島) 등 요동반도의 연해 도서들을 전전하였다. 당시 토벌을 맡은 인물 가운데 하나가 주문욱이었다.

주문욱 등이 거느린 수군은 1633년 1월에 공유덕 등의 반란군을 추격해 3월에 지금은 신도(薪島)라 불리는 평안도 용천 앞바다에 위치한 장자도(獐子島)에 이르렀다. 주문욱 휘하의 명군은 4월에 압록강 부근의 탁산(卓山)에서 공유덕이 거느린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주문욱은 미곶(彌串)에서 조선에 문서를 보내 공유덕 등을 소탕하기 위하여 협력하자는 의견을 제안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1년 4월 13일). 8월에는 공유덕 등이 후금병을 끌어들여 여순(旅順)을 습격하여 도독황룡(黃龍)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주문욱은 녹도(鹿島)로 물러가 주둔하였다(『인조실록』 11년 8월 5일). 3달(3개월) 뒤인 11월에는 도독심세괴(沈世魁)가 주문욱이 뇌물을 받지 않자, 그를 하(河) 태감(太監)에게 참소하여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1년 11월 10일).

참고문헌

  • 『명사(明史)』
  • 『청사고(淸史稿)』
  • 『청실록(淸實錄)』
  • 『내국사원당(內國史院檔)』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 한명기, 『병자호란』, 푸른역사, 2013.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