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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3 기준 최신판




청 초기 안찰사·포정사를 지낸 인물.

개설

장정매는 청 강희 연간에 관직에 나아가 건륭 연간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는 장정매가 삼한인(三韓人)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국조기헌유징(國朝耆獻類徵)』에는 ‘한군인(漢軍人)’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한인으로 구성된 한군 팔기(八旗)에 소속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 연간에는 세 차례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었고, 옹정 연간에 복건성(福建省)의 안찰사와 포정사를 역임하였다. 건륭 연간에도 관료로서 계속 생활하였는데, 재주는 있으나 국량이 작다는 평가를 받았다.

활동 사항

1717년 숙종이 눈병의 치료를 위한 약재를 구하기 위하여 재자관(䝴咨官)이추(李樞)를 보내어 청 예부에 자문(咨文)을 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강희제는 한림원(翰林院) 시독학사(侍讀學士)아극돈(阿克敦)과 난의위(鑾儀衛) 치의정(治儀正)장정매(張廷枚)를 보내어 약재를 주었다(『숙종실록』 43년 10월 13일). 그해 10월 27일 숙종은 장정매 등을 접견하고 강희제의 지의(旨意)를 들었는데, 숙종이 40년에 걸쳐 정치를 잘하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태평한 복을 이루었음을 치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 장정매 등이 가져온 약재인 공청(空靑)이 말라 버려서 안질의 치료에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숙종실록』 43년 10월 27일).

장정매는 이후에도 칙사로서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다. 1717년 12월에는 청의 황태후(皇太后)가 죽자 청에서는 다시 아극돈과 장정매를 파견하여 부음을 알렸고(『숙종실록』 43년 12월 27일), 1719년 1월에는 황태후를 부묘(祔廟)한 사실을 반사하기 위하여 내각(內閣) 학사(學士)겸예부시랑(兼禮部侍郞)덕음(德音)과 함께 왔다(『숙종실록』 45년 1월 26일).

장정매는 옹정 연간에 복건성의 양저도(糧儲道), 안찰사, 포정사를 역임하였다. 관료로서는 비교적 성공적인 길을 걸었지만, 재주에 비하여 사람 됨됨이가(성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 이후에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장정매가 조선의 경치·풍토·연향 및 영송 절차 등에 대한 「봉사고려기사시(奉使高麗紀事詩)」를 지었다고 하나, 실제 작품을 확인할 수는 없다.

참고문헌

  •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
  • 『청세종실록(淸世宗實錄)』
  • 『청고종실록(淸高宗實錄)』
  • 『성호사설(星湖僿說)』
  • 『해동역사(海東繹史)』
  • 『국조기헌유징(國朝耆獻類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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